교회 이야기 13 – 태양교회 이야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영성이 살아 숨 쉬는 교회
부여에서 서천으로 가다 보면 드넓은 구룡평야가 펼쳐져 있고 국도 오른편으로 구룡면사무소와 구룡초등학교, 보건소, 소방서가 밀집해있는 태양리 마을과 그 가운데 우뚝 세워진 태양교회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여에서 서천에 이르는 도로변에 가장 우람하게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예배당 건물은 항상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태양리 삼거리는 서천과 대천으로 분기(分岐)하는 길이지만 동시에 부여를 향하는 길에서는 다시 만나 조우(遭遇)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교통의 중심지다. 그래서 태양리 마을은 예부터 항상 사람들이 몰려오는 큰 마을을 형성해왔다.

(태양교회 전경)
평신도 사사(士師)들의 불타는 신앙으로 출발한 교회(1951.8)
구약의 사사시대는 ‘영적 혼돈과 흑암’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위대한 평신도들’의 시대였다. 12지파가 연합한 신앙공동체가 주변 나라들의 영적, 군사적 공격 앞에 큰 위기를 맞고 있었을 때,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농부, 여인, 장애인, 서자 등, 평범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셨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2:9)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지상의 현장교회는 훈련받은 직분상의 목회자들이 앞장섰고 성도들은 그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일으켜 세웠다.
태양교회는 그 시작부터 새로운 길을 걸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평신도 사사(士師)들의 불타는 신앙으로 교회가 창립되었고 부흥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평신도였던 ‘고창석 집사’(1961년 장로임직)는 태양교회 창립부터 교회가 안정을 이루기까지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한영수 목사(초기 충남노회 교회들을 세우는데 공헌)의 생질이었던 그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구룡지서장으로 재직하면서 1951년 8월 2일~6일까지 구룡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감리교 부흥사 이강산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 부흥집회를 열었다. 6.25 전쟁 중이던 엄중한 시기에, 그 지역의 치안 책임자의 신분으로 부흥회를 개최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혔던 사람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부흥회의 열기는 뜨거웠고 많은 결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흥회가 끝난 다음 날인 1951년 8월 7일, 부락 공회당에서 역사적인 교회창립예배를 드렸다. 계속되고 있는 전쟁의 위기 속에서 불안과 절망에 빠져있던 태양리 주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속에서 소망과 위로의 빛을 바라보게 되었다.
태양교회의 초기시절(1951. 8 ~ 1969. 3)
교회가 창립되자 복음에 목말랐던 태양리 주민들이 몰려오면서 교회는 부흥되기 시작했고 서둘러 교회를 목회할 목회자를 찾았다. 1951년 8월, 제 1대 태양교회 교역자로 김영만 장로(전도인, 1951.8 ~ 1952.5)가 부임한 이래, 2대 김영찬 전도인(1953.3 ~ 1954. 2)이 1년씩 시무했고 김영찬 전도인의 재임기간인 1953년 4월 11일 태양교회는 첫 예배당을 건축했다. 고창석 집사의 아내인 이영순 집사가 헌납한 재봉틀을 매각한 돈으로 당시 ‘민청사무실’로 사용하던 목조기와집(12평)을 매입하여 연안 이씨 종중(宗中) 땅인 삼나무 밭으로 이전하여 재건축한 것이다.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처럼, 그 시절 거의 집 한 채 값이었던 재봉틀을 교회 건축을 위해 바쳤고, 그 옥합으로 첫 예배당을 건축했다. 교인들은 민청사무실을 해체한 목재와 기와를 일일이 지개로 운반했다. 태양교회의 첫 예배당은 아름다운 헌신에 더하여 온 교인의 수고로 지어졌다. 교 건축 이듬해인 1954년 3월에는 임달호 목사가 제 3대 목회자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건축한 새 예배당에서 성황리에 부흥회를 개최했다.

(1953년 건축한 첫 예배당, 좌/ 이듬해인 1954년에 열린 부흥회, 중/ 년도미상의 태양교회 현황, 우)
임달호 목사는 5년간의 시무를 마치고 1959년 2월 사임했고, 태양교회는 1961년 7월 21일, 장로로 피택 된 고창석, 윤재현 집사의 장로 임직식을 반교교회 이지철 목사의 집례로 거행했다. 그동안 직장을 따라 오가기를 계속했던 고 장로는 1961년 5.16 군사정변과 함께 민선 면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태양리에 정착하여 초대장로가 된 것이다. 이 때 부터 고 장로는 태양교회에 목회자가 공석인 경우에 모든 예배를 맡아 인도했을 뿐 아니라, 사실상 목회자의 역할을 성실히 감당했다. 1962년 12월 태양교회는 제 4대 목회자로 김기현 목사를 첫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그리고 고 장로와 함께 임직한 윤재헌 장로는 1963년 3월 31일, 태양교회를 떠나 수목리에 거주하는 태양교회 교인들과 함께 수목교회를 창립했다. 수목교회는 현암교회와 더불어 태양교회가 분립해 세운 교회들이다. 김기현 목사는 부임 1년만인 1963년 12월, 교회를 떠났고 1969년 3월, 차기 목회자가 부임하기 전까지 6년여 동안 고창석 장로가 태양교회의 목회를 담당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41평의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했다. 1965년 6월 19일에 완공된 새 예배당은 그동안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에는 비좁고 불편했던 12평 첫 예배당을 헐고 온 교인을 품을 수 있는 예배당으로 신축한 것이다. 벽돌 건물로 짓기 위해 이른 봄부터 온 교인이 동원되어 냇가의 모래를 퍼서 손수 벽돌을 찍어 날랐다. 모아진 건축비가 없어서 헌금이 모아질 때마다 조금씩 공사를 진행했다. 동네 주민들도 함께 나서서 협력하기 시작했다. 예배당 건축이 온 마을의 공사가 된 것이다. 예배당 골조가 완성되자마자 창고건물 같은 바닥에 밀대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렸고 밤에는 촛불을 밝히며 찬송하고 기도했다. 내부공사가 하나씩 완성되고 마침내 전깃불이 들어오는 날, 처음으로 대낮처럼 환해진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 온 교인은 감격하여 마치 천국에서 예배드리는 감동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태양교회의 초기 역사를 보면 마치 성경의 사사시대와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교회를 창립했고 교역자가 없는 동안에는 교회를 이끌었으며, 교회를 분립해 새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담임목회자가 공석일 때에도 교회는 장로를 임직했고 온 교인들이 앞장서서 새 예배당을 건축했다. 지금도 태양교회는 일반적으로 여신도회가 교회사역에 더 적극적인 교회들과는 달리 남신도회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며, 4개의 남신도회와 4개의 여신도회가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태양교회는 남신도들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크다.

(고창석 장로와 1965년 신축한 두 번째 예배당)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이루며(1969. 3 ~ 2000. 10)
예배당건축으로 태양교회는 점점 교회성장과 안정을 이루어갔고 1969년 3월, 제 5대 목회자로 충남노회 박준필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교회는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박 목사가 미국교포교회 목회에 대한 새로운 꿈을 품으면서 1970년 8월, 1년여 동안의 태양교회 목회를 접고 온 가족과 함께 도미했다. 박준필 목사 후임으로 1970년 12월 제 6대 목회자로 부임한 백일균 목사는 5년여 동안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농촌문화 중 하나인 “품앗이문화”를 적극 활용해 교회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모내기 작목반”을 조직하면서 나중에는 농사 짓는 교인들 뿐 아니라, 안 믿는 주민들까지 모두 “작목반”에 들어와 함께 협력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상을 당한 성도의 장례를 위해 교회가 꽃상여를 마련했는데, 마을 주민까지 꽃상여 장례식을 선호하게 되면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들의 대소사의 중심이 되어갔다. 그러나 백일균 목사는 부임 5년 만인 1975년 7월 장로 임직을 앞두고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고 태양교회는 1975년 12월 5일, 시찰장 김승재 목사(홍산교회)의 집례로 정석채, 리덕기 장로 임직식과 함께 김현태, 주순례, 이영순, 이선배, 황선봉, 한계순 등, 6명의 권사를 임직했다.
1976년 1월, 구재철 목사가 태양교회 제 7대 목회자로 부임했다. 그러나 구 목사는 재임동안 아쉽게도 교회에 많은 어려움을 안겼고 이듬해인 1977년 5월 교회를 떠났다. 그 뒤를 이어 1977년 5월 제 8대 목회자로 부임한 정창수 목사는 12년간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교회의 어려움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성장시켰다. 정 목사는 교회의 강단부분을 증축하여 예배당을 확장했고 언덕위에 세워진 교회건물 입구를 종탑형태의 복층구조로 높이 세워 사방에서 예배당 건물이 잘 보이도록 했다. 1990년 3월, 정창수 목사 후임으로 젊고 활동적인 이광수 목사가 제 9대 목회자로 부임하여 10년 동안 재직하며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교회를 창립하고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평생 동안 충성해온 고창석 장로는 1993년 5월 8일 명예로운 은퇴와 함께 원로장로로 추대 받았다. 교회는 계속 성장했고 1993년 12월 3일 고윤수 장로 임직과 유흥근, 박종남, 조명구, 김숙배, 정태회, 박종현, 서동순, 이광희, 유복희, 임정호, 도근홍, 최옥수, 윤복례 등, 13명의 권사를 임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