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논, 황산벌에 세워진 논산성광교회 이야기
논산을 지날 때마다 ‘논산(論山)’이란 지명의 뜻을 몰라 궁금했다. 뫼 산(山)은 뜻이 분명한데 “논할 논(論)” 자를 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옛 사람들이 논산을 ‘놀(눌) 뫼’, ‘노(누)르 뫼’로, 또는 ‘널(너르) 뫼’로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의문이 풀렸다. ‘놀(눌) 뫼’, ‘노(누)르 뫼’는 ‘누렇다’, ‘노랗다’란 뜻의 ‘황(黃) 자(字)’를 차용하여 ‘황산(黃山)’으로 불렀고, ‘널(너른) 뫼’는 ‘아주 너른’, ‘널찍한’이란 음(音)을 가진 ‘논(論) 자(字)’를 차용하여 ‘논산(論山)’이라고도 부른 것이다. 거대한 김제평야가 강경을 거쳐 논산에 이르러 큰 산들이 평야의 끝자락을 삼면으로 넓게 에워싸고 있어서 ‘논산(論山)’이요, 주변 산의 토질이 황색(黃)을 고 있어서 ‘황산(黃山)’이다. 이 드넓은 황산벌에는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던 계백장군의 얼이 이어져오고 있고, 논산을 중심으로 끝없이 펼쳐진 너른 평야는 이곳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풍요한 곡창지역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논산평야를 품은 논산시와(좌) 백제의 얼이 새겨진 황산 벌
지난(至難)했던 교회설립 이야기(1977년 6월 ~ 1979년 4월)
논산시내에는 세 개의 기장(基長)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역사가 깊은 새샘교회와 최근에 대전노회에 가입한 논산예향농아교회는 논산의 구도심지에, 새샘교회에서 분립하여 시(市) 변두리에 세워졌던 논산성광교회는 현재, 구 도심지와 신 개발지역을 연결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논산성광교회가 당시 논산교회(새샘교회)에서 분립하게 된 것은 논산교회 담임목사였던 송일섭 목사가 폐질환으로 6개월여의 장기입원을 하면서 비롯되었다. 목회자의 공백이 길어지는 것을 염려한 당회는 차기 목회자로 당시 부교역자, 김석인 전도사를 청빙하기로 결의했다. 투병 중인 담임목사에 대한 대책 없이 신임 목회자의 청빙을 서두르는 당회의 처사에 반발하는 교인들이 있었으나 당회는 성도들의 의견을 수용하기보다는 당회의 결정에 따르기를 원했다. 결국 1977년 6월 10일 김규환 집사를 중심으로 김병록, 송재린, 송재경, 박노문, 황정순, 이우숙, 김순자, 송명자 집사 등, 서리집사 21명, 어린이를 포함한 일반성도 69명 등, 총 90명이 논산교회를 떠났다. 주로 젊은 집사들과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투병중인 송일섭 목사와 함께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힘든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논산교회 김석인 전도사는 교회분립에 책임을 지고 논산교회를 떠났다.
논산교회를 떠난 성도들은 충광여인숙 2층(시외버스 정류소 인근) 30평을 임대하여 1977년 6월 17일 동부시찰장 김옥남 목사 인도로 교회 창립예배를 드렸으며 교회 이름은 송일섭 목사의 제안에 따라 “논산성광교회(이후 성광교회)”로 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떠난 교인들의 복귀를 원했던 논산교회는 분립을 인정하지 않아 노회의 설립허락은 지연되었고, 결국 노회로부터 목회자 파송을 받지 못한 채 1977년 6월 24일 감리교단 소속 조희영 전도사(목원대 신학과 3년)가 임시 교역자로 부임하여 2년여 동안 교회를 섬겼다. 노회의 설립허락을 받은 것은 1978년 4월 13일 대전노회 제 34회 정기회에서였다. 그 후 조희영 전도사는 1979년 4월 30일 교회를 사임했고 그해 5월 6일 성광교회의 청빙을 받은 구기환 전도사가 노회 허락을 받아 시무 전도사로 부임했다. 2년여 동안의 지난(至難)한 기다림 끝에 새 출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성광교회의 기초를 놓은 구기환 목사(1979년 5월 ~ 2000년 9월)
구 전도사가 교회에 부임하면서 교회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고 김규환 집사(현 대전중원교회 원로장로)의 모친인 박귀녀 집사가 1979년 6월 5일 땅 100평을 헌납하면서 교인들은 예배당 건축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교회는 헌납된 땅을 매각하고 교회건축에 적합한 인근의 184평(논산시 취암동 145-4)을 매입하여, 1979년 9월 1일 예배당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충분한 준비 없이 건축을 시작했지만 온 교인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젊은 집사들과 청년들로 구성된 교회는 재정적 여력이 없었고, 구 전도사는 건축비 마련을 위해 부모가 유산으로 남겨주신 논(畓)을 처분하여 건축헌금으로 드리기도 했다. 마침내 그 이듬해인 1980년 10월 5일, 온 성도와 함께 55평의 예배당을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교회창립 후 3년 4개월 만에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구 전도사는 예배당 입당 다음해인 1981년 3월 20일 충남노회 37회 정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성광교회 1대 전도목사가 되었고 교회설립에 함께했던 송일섭 목사는 건강을 회복하여 서산 부석교회로, 두 아들 송재린, 송재경 집사는 목회의 부름을 받아 시무교회로 부임해갔다. 삼부자(三父子) 목사는 대전노회에서 평생 교회를 섬기며 선한 발자취를 남겼다.
젊음을 바쳐 성광교회의 기초를 놓은 구기환목사(좌)와 온 성들과 함께 세운 성광교회 예배당
1985년, 성광교회는 목사관과 소모임실까지 완공하면서 점점 안정되어갔다. 그런데 이제 막 교회가 성장을 시작해야 할 때, 그동안 교회를 위해 쉼 없이 달려온 구 목사에게 건강상의 위기가 찾아왔다. 목 뒤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얼마 후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어 2000년 9월 21일 6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매사에 직선적이고 옳다고 여기는 일은 주저 없이 실행에 옮겼던 구 목사는 그로 인해 교인들과 부딪치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그만큼 올곧고 욕심 없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성광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일을 맡기셨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물에 뛰어들었던 베드로처럼 교회 개척과 건축, 사택 건축,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헌신해 섬겼다. 교회 목회와 노회의 부노회장 직(職)마저 채 마치지 못하고 주님 품에 안긴 구 목사를 전 노회가 함께 가슴 아파하며 떠나보냈다.
성광교회의 안정을 이룬 허정강 목사(2001년 3월 ~ 2006년 7월)
구 목사가 소천한 후, 교회는 크게 상심했고 6개월 후 허정강 목사가 부임했다(2001년 3월). 마음이 밝고 부드러운 허 목사는 교인들의 아픈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허 목사가 인도하는 찬양의 은혜로 성도들의 심령은 위로받았고, 온화한 설교로 힘을 얻었으며, 성도들 간의 긴밀한 교제의 장(場)을 만들어 “행복한 목회, 행복한 삶”을 누리는 교회로 만들어갔다. 현재 서울 성남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허 목사는 성광교회의 5년간의 목회를 돌이켜보며 “행복한 목회”였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