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나무’와 ‘주엽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삼용마을, 삼성교회
삼성교회가 서 있는 ‘삼용리’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세 갈래의 물이 한데로 합쳐 흐르는 “삼천(三川)마을”과 용이 꿈틀대는 형상인 “용성(龍城)마을”의 각 첫 글자를 따서 부여군 남면 “삼용리(三龍里, 부여군 남면)”로 병합하였다고 한다. ‘홍산 – 부여’를 잇는 국도에서, 삼용리로 들어가는 표지판을 따라가 보면, 나지막한 능선 아래로 삼용리 110여 채의 가옥이 그림처럼 도란도란 모여있고, 그 마을 끝자락에 삼성교회가 온 마을을 가슴에 품듯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삼성교회를 지나 그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 보면, 갑자기 툭 터진 드넓은 농지가 사방으로 펼쳐진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벌판이 막 시작되는 곳에 온 주민이 모일 만한 넓은 공지에 정자가 서 있고, 400년 수령의 보호수(保護樹)인 ‘삼용 정자나무’와 최근 문화재청의 천연기념물 지정(추가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수령 미상의 ‘주엽나무’(높이 16m·둘레 2.5m)가 우람하게 서 있다. 바로 이곳이 오늘의 삼성교회를 잉태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부여군 남면 삼용리에 세워진 삼성교회
창립기 - 형제교회의 전도 집회로 세워진 교회(1930년 ~ 1941년)
1920~30년대는 일제의 강압적 식민 통치를 거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3.1 만세운동에 교회가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커졌고, 이로인해 많은 청년, 우국지사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던 시기였다. 때마침 전북노회가 제주선교를 중단하고 그동안 소원했던 충남 지역의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9인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춘원 목사를 서천, 부여지방으로, 이근호 목사는 남포지방으로 파송하면서 충남 지역에 교회 개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삼용 정자나무’와 그 곁에 선 ‘주엽나무’
1930년 6월 홍산지역의 교회들이 홍산교회에서 모여, 남면 삼용리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의한 후, 1930년 7월 1일 홍산교회 백남철 장로를 비롯한 김재련, 문복열 씨 등이 ‘삼용 정자나무’ 아래에서 전도 강연회를 열었다. 삼용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 홍산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에 의해 삼용리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이날, 갑작스런 소낙비가 내렸고 비에 쫓긴 전도 대원들이 허둥지둥할 때, 삼용리 이신애 여사(정재호 씨의 부인)가 전도 대원들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였고 이 일로 이신애 여사는 빌립보교회의 첫 교인, 자주 장사 루디아처럼(행16:13-15) 삼용리 교회의 첫 교인이 되었다. 홍산교회가 내밀어 준 손을 잡고 삼용리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우뚝 세워진 것이다. 홍산교회와 삼용교회의 파트너십은 그 이후에도 3대에 걸친 ‘순회 전도사’ 시기와 한 목회자 두 교회 체제(공동 담임목사)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마치 부여군 보호수인 “삼용 정자나무” 곁에 함께 서 있는 “주엽 나무”처럼.
삼용리를 품고 서 있는 삼성교회 400년 수령의 보호수 삼용 정자나무 주엽나무(천연기념물 지정대상)
신실한 평신도들의 헌신이 밑바탕이 된 교회
삼용교회(현재의 삼성교회)는 그 초기에 신실한 평신도들의 헌신적인 섬김으로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갔다. 특히 이신애 성도의 남편 정재호 씨가 그의 사랑채(삼용리 22번지)를 삼용교회의 예배처로 내놓으면서 지역교회로써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규태 목사의 충남노회사에 의하면 정재호 성도는 삼용리가 속한 남면(南面) 면리원 15년, 행전대 10년, 청년단장 3년, 국민위원장 5년, 부여군 독립촉성회 임원 등, 남면(南面)뿐 아니라 부여를 대표하는 인사로 명망이 높았다. 정재호 성도는 1932년 9월 삼용리 135번지 초가 1동(9간)을 매입하여 삼성교회의 첫 교회당으로 헌납했다. 삼용교회가 독립된 교회당 건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기도와 친교 모임의 중심이 되자, 당시 동네에서 ‘구슬을 꿰어 만드는 가내수공업’을 농한기 부업으로 삼았던 교인들과 주민들은 서로 협업할 “구슬공장”으로 예배당 부엌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교회가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초기 삼용교회를 세웠던 순회 교역자들
삼용교회의 초기에 교회를 든든하게 세웠던 이들은 신학 전문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고 사명감에 불타 자신의 젊음을 불태웠던 순회 전도사들이었다. 임두준 전도사는 홍산 지역의 여러 교회(삼용, 송암, 정동, 내산, 운티, 온해, 반교, 문신, 지선)를 순회하며 교인들을 돌보며 섬겼다. 한 교역자가 농촌의 9개 교회를 순회하며 돌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촌음을 아끼고 온 힘을 다해 교회들을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임두준 전도사의 처소를 삼용교회가 제공하면서 삼용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이로인해 예배와 모임, 목회자와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 교회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임 전도사(1932년 ~ 1936년)의 뒤를 이어 한정택 전도사(1936 ~ 1938년), 염순석 전도사(1938년 ~ 1942년)가 그 뒤를 이어 삼용교회를 비롯한 홍산지역 교회들을 섬겼다.
안정기 – 대를 이어 헌신한 평신도들, 살신성인한 목회자들(1942년 ~ 1958년)
삼용교회에는 특히 대를 이어 충성한 가문들이 많았고 신실한 목회자들의 희생적 섬김이 있었다. 이것이 오랫동안 민족적 고난과 위기, 교회에 닥쳐온 엄혹한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삼용교회를 지켜 온 저력으로 보인다.
대를 이어 헌신한 평신도들
- 정재호 – 정찬회 장로 가정
삼용교회는 1942년 3월 교회 설립과 부흥에 큰 역할을 감당했던 정재호 씨를 초대 시무장로로 임직했다. 정규태 목사가 1942년 1월 삼용교회의 공동 당회장으로 부임한 직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는 남면(南面)을 대표하는 부여지방의 인사로 명망이 높았으며 특히 해방 후 부여군 독립촉성회 임원으로 건국 운동에 기여했고, 무엇보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앞장서 헌신했다. 그러나 그는 6.25 한국전쟁 때, 평생 국가와 교회, 지역을 위해 헌신한 일로 인해 인민군들의 숙청 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체포된 후 대천 형무소로 끌려가, 무참히 피살되었으며, 그 시신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큰 슬픔에 빠진 유족들은 빈 무덤을 만들어 그 묘역을 단장했고, 교인의 존경을 받았던 지도자를 잃은 교회는 비통한 마음으로 애도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주를 위해 헌신한 순교자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애국지사로 충남노회 역사에 오래 남을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정재호 초대장로 아들 정찬회 장로(3대)
그의 아들 정찬회 장로는 1964년 2월 28일 선친 정재호 장로의 뒤를 따라 대를 이어 제3대 시무장로로 임직되어 교회에 충성했고, 1978년 1월 교육관 건축을 위해 부지 150평을 헌납하기도 했다. 또한 고(故) 정재호 장로의 손(孫), 정우열 목사는 한신대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군목으로 복무한 후 전역하여 대천대흥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 최근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