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로
이웃을 섬겨온 교회
유성(대전시)을 지나 세종시로 가는 북유성대로변에 반원형의 지붕을 한 아담한 교회 하나가 서있다. 자신의 모습을 애써 겉으로 드러내려하지 않으려는 듯, 높이 솟은 종탑이나 시선을 끄는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이 회색빛 노출 콘크리트로만 건물을 감싼 모습이다. 그 한 편에 교회임을 나타내는 조그만 십자가와 “고백교회”라는 싸인이 조용히 벽에 붙어있다.

세종시로 향하는 대로변에 세워진 고백교회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Confessing Church)”라는 이름은 흔하지 않은 이름일 뿐 아니라 쉽게 붙이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이름이기도 하다. “고백교회”는 본래 나치즘과 이에 호응하고 추종했던 독일 국가교회에 대항하여 전개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운동”에 참여한 교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고백교회”라는 이름에는 성서 이외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이념, 세속적인 가치에 지배당하거나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성서적인 신앙고백에 충실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마르틴 니묄러, 하인리히 그뤼버, 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등, 독일의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한 지도자들은 히틀러와 나치 치하에서 이를 거부하고 온갖 고난과 희생을 불사하며 교회의 본질을 지키려 했다. 대전의 “고백교회”가 교회를 지배하고 예속시키려 한 모든 것으로부터 힘을 다해 충실하게 지키려고 한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고백교회의 첫 출발과 야학 이야기(1984년 ~ 1986년)
고백교회는 1984년 1월 15일 강명중 전도사 가정이 대전시 중구 도마 1동 30-31, 김상문 씨 댁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고 그해 2월 26일 동구 자양동 208-1 상가 2층을 고백교회 예배당으로 임대했다. 개척교회는 항상 “꿈과 비전”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대전의 변두리에서 시작된 고백교회는 당시 한국교회에 불었던 기복주의적 신앙, 교회 급성장, 대 교회주의의 혼탁한 바람 속에서 독일의 “고백교회”를 앞으로 나가야 할 새로운 교회의 모델로 삼았던 것 같다. 그것은 외형적 교회 성장에서 건강한 내적 성숙으로, 교회 확장을 위한 교회 중심적 선교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새로운 교회로의 출발을 의미했다.
고백교회의 시작은 순탄했다. 1984년 4월 7일, 초대 집사로 김충식, 이유경, 김복례, 김정림, 김혜경, 황혜수 등, 6명을 임명했고 그해 5월 8일 대전노회로부터 교회설립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1985년 봄, 고백교회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서둘러 ‘야학’을 시작했다. 고백교회의 설립 정신에 따라 어려운 이웃을 돕고 섬기는 첫 사역을 집안과 경제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한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고등학교 야간과정을 개설한 것이다. 청년들과 온 교인이 하나 되어 2년 동안 교회가 그 지역의 가난한 청소년들의 배움터가 되어 주었다.

자양동 첫 교회당 야학을 시작한 용두동 교회당
그런데 고백교회가 온 힘을 다해 설립한 야학은 2년 만에, 운영을 중단하고 폐교하고 말았다. 야학을 중단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대전시 중동 한약 골목의 약제상 점원으로 일하던 가난한 한 학생(18세)이 있었는데, 점원으로 번 돈으로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독자(獨子)였다. 어느 날, 야학 학생들이 대전 ‘안영천(川)’으로 소풍을 갔는데 하필 그 가난한 독자 아들이 물놀이 중 익사했다. 아들 하나만 의지하고 살았던 모친의 상심은 무엇으로 위로할 수 없을 만큼 컸고, 무엇보다 이를 수습해야 할 고백교회는 소수의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개척교회로 사고를 수습할 만한 힘도, 재정적 여력도 없었다. 교회가 출발한 후 맞이한 첫 시련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었다. 교회는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위기 앞에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유족을 대표해서 교회를 찾아온 분은 자신이 장애인이면서 장애인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였고, 그 목사님은 교회로부터 전후 사정을 듣고는 이 사건은 ‘배상을 논할 사고사’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으로 받아들이자며 유족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가난 중에도 홀어머니와 직장, 야학에 성실했던 소중한 청년의 죽음을 놓고, 그동안 가난한 학생들을 품고 교사들과 함께 희생적 사랑을 감당한 개척교회에 그 어떤 배상도 물어서는 안 된다며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모든 배상책임을 큰 사랑으로 덮었다. 고백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큰 위기의 강을 건넜다.
교회 성장과 갈마동 교회 건축 이야기(1986년 ~ 1994년)
이 사건으로 “야학”은 2년 만에 중단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확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온 교인이 뜨거운 마음으로 교회 부흥을 위해 힘썼고 하나님이 은혜로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5년 11월에는 중구 내동 49-7 상가로, 1987년 3월에는 중구 변동 47-9 상가 2층으로 이전했다. 강 전도사는 1987년 2월 26일 대전노회 정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고백교회의 전도목사로 부임했으며, 1991년 1월 25일 김충식, 구본현 장로 임직과 함께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교회 개척 7년 만에 담임목사 취임과 시무장로를 임직한 조직교회가 된 것이다.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개척 이후 10여 년 동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해 임대 건물을 전전하는 ‘출애굽 광야교회 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신도회가 교회 건축을 위해 앞장섰다. 교회 안에서 여러 행사를 통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직접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모았다. 큰돈 대신 작은 푼돈을 모으고 단번에 큰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대신 꾸준히, 땀 흘리며 조금씩 조금씩 건축헌금을 모아갔다. 티끌을 모아 태산이 된다. 이것이 온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온 교인들의 관심을 예배당 건축으로 향하게 했다. 마침내 교회창립 10년이 되는 1994년에 교회를 건축하기로 온 성도가 마음을 모았다. 교회는 제직들의 명의로 신협 대출을 받아 건축기금을 마련했고, 교회 재정으로 대출금을 갚아가기로 했다. 1993년 9월 9일 서구 갈마동 313-10의 아파트와 일반주택이 모여 있는 도로변의 대지 182평을 매입했고 건축비를 절감하기 위해 철골조 사이딩 패널로 100여 평의 아담한 예배당을 건축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도시에서 개척한 교회가 결코 쉽게 돌파하기 어려운 예배당 건축을 큰 부채 없이 10년 만에 이루게 된 것이다. 1994년 5월 5일 고백교회 온 성도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교회창립 10주년 기념 예배와 함께 새 예배당 입당 예배를 드렸다.

갈마동에 건축한 첫 교회당 교회당건축에 앞장선 여신도회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