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인순 – 함연호, 함길호 장로 가정
삼용교회는 1952년 12월 23일, 함인순 씨를 제2대 장로로 임직했다. 정재호 장로가 1950년 인민군에 의해 순교한 지 2년 후의 일이었다. 함인순 장로는 정재호 선임 장로의 뒤를 이어 13년 동안 성실하게 교회를 섬겼다. 함인순 장로의 아들로 삼용교회 제4대 장로로 섬긴 이는 함연호 장로이다. 함 장로는 1972년 12월 28일 선친의 뒤를 따라 30대의 젊은 나이에 시무장로로 임직하여 46년간 교회를 섬겼고, 충남노회의 장로 부노회장과 장로회장, 총회 총대로 노회를 섬기는 일에도 힘썼다. 또한 1999년 10월 3일 8대 장로로 임직한 함길호 장로는 함연호 장로의 실제(實弟)로 선친 함인순 장로, 사형(舍兄) 함연호 장로와 함께 삼용교회를 섬겼다.
함임순 장로(2대) 子함연호 장로(4대) 함길호 장로(8대)
삼용교회가 설립된 초기부터 대를 이어 오랫동안 주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섬긴 가문이 있었다는 것은 복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신성인한 목회자들
- 정규태, 한선수 목사(1942년 ~ 1945년)
1939년부터 2차 세계 전쟁에 참여한 일본이 내부 단속에 나섰고 특히 한국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강요와 함께, 한국교회를 일본 기독교단에 강제 병합시키면서 이에 항거하는 200여 교회의 강제 폐쇄, 2천여 성도의 투옥, 50여 교역자가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교회는 크게 위축되었고, 충남노회에 속한 교회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목회자들은 두 교회를 공동(겸임)으로 시무하기도 했는데, 충남노회의 창립 위원이며, 후일(1963년) 총회장을 역임한 정규태 목사는 홍산, 삼용교회의 공동전도 목사와 홍산지역의 5개 교회(홍산, 홍연, 홍양, 삼용, 반교)의 당회장(1942년 1월)으로 섬기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7일, 청포교회의 청빙을 받은 후 사임했고, 그 후, 홍산 지역의 홍연, 홍양교회 공동 전도목사로 부임한 임달호 목사가 나머지 홍산지역의 3개 교회(홍산, 삼용, 반교)의 당회장으로 섬겼다.
정규태 목사 한선수 목사 나영수 목사
1946년 4월 18일 정규태 목사의 뒤를 이어 홍산교회와 삼성교회는 공동으로 한선수 목사를 임시(전도) 목사로 청빙했다. 그러나 한선수 목사는 1947년 6월, 1년여의 시무 끝에 사임했고, 1949년 7월 23일 나영수 전도사가 그 후임으로 부임하기까지, 2년여 동안 임달호 목사가 삼용교회와 홍산교회의 당회장으로 시무했다. 고향이 부여 홍연인 임달호 목사는 오랫동안 홍연교회와 고향 주변의 교회들을 맡아 섬겼고, 교역자가 없는 고향 교회들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감당한 선한 목자였다.
- 나영수 목사, 한정택 전도사(1946년 ~ 1958년)
한선수 목사가 사임한 후, 2년 동안 시무 교역자가 없었던 삼용교회에 1949년 7월 23일, 이제 막 신학교를 졸업한 나영수 전도사가 부임했다. 나영수 전도사는 그의 첫 목회지였던 삼용교회에 부임하여 전심으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부임 후 다음 해인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초대 정재호 장로는 인민군에 의해 순교했으며, 나 전도사는 한동안 교회에 감금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교회는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았고 1951년 12월 23일 초대 정재호 장로의 뒤를 이어 함인순 장로를 2대 장로로 임직했다. 그리고 1952년 3월 삼룡교회는 충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은 나영수 강도사를 임시(전도)목사로, 1953년 충남노회 제9회 정기회에서 위임(담임)목사로 청빙했다. 나영수 목사는 1954년 3월 16일 세도교회의 청빙을 받아 5년 동안 시무했던 그의 첫 목양지, 삼용교회를 떠났다.
나영수 목사의 이임 후, 1954년 4월 8일 삼용교회는 창립 초기에 시무했던 한정택 전도사를 재청빙했다. 교인들의 마음에 그의 성실성과 따뜻한 성품이 오랫동안 남아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 전도사는 4년 재임 중 성실하게 교회를 섬겼고, 성도들과 함께 목회자 사택 15평을 건축했다.
새 교회당 건축(1948년)
교회당을 신축하는 일은 오랫동안 준비하고, 온 교인의 물질적 헌신과 전심으로 하나 되어 기도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에 온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인도할 담임 목회자가 앞장서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삼용교회는 한선수 목사 사임(47년 6월) 후, 담임 목회자가 공석으로 있던 1948년 4월, 그동안 매입하여 사용했던 초가 9간 교회당 구옥(舊屋)을 떠나 현재의 새 터(삼용리 81번지)를 새로 매입하여 25평 기와로 된 교회당을 건축했다. 정규태 목사의 “대전노회사”에 수록된, 제5회 정기노회 요록(要錄)에 따르면 “삼용교회 와가(瓦家, 기와집) 25평 신축(정재호 장로)”이란 기록이 나온다. 아마도 정재호 장로가 앞서고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새 교회당을 건축했다는 기록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49년 9월 8일, 대전노회 제1차 임시회를 신축한 삼용교회당에서 개최했다.
성장기 – 임달호, 안지림, 김대곤, 이선규 목사 (1958년 ~ 1983년)
삼용교회는 창립 이후 오랫동안 매우 안정적으로 꾸준히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교역자와의 갈등이나 교인들 간의 분쟁이 없었고 국가적 환난과 궁핍한 시기에도 예배당을 신축했다. 그리고 1958년 4월 8일 삼용교회가 창립된 지 28년 만에 제1대 담임목사로 임달호 목사가 부임하면서 삼용교회의 성장기가 시작된다.
- 임달호, 안지림 목사(1958년 ~ 1967년)
임달호 목사는 1945년 충남노회 창립발기 위원장(위원 : 송일태, 정규태, 최석철 목사)으로 충남노회의 기초를 놓은 교계의 원로였다. 매사를 말씀의 원칙에 따라 바르게 살았던 그는 1945년 7월 말, 그의 친구였던 옥산면장(박선규)이 한밤에 찾아와 8월 18일 일제(日帝)에 의한 전국 기독교 목사를 체포 구금한다는 정보를 듣고도, 순교를 각오하며 교회를 지켰고, 6.25 한국전쟁 시에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가면서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남기고 찬송을 부르며 부여 경찰서에 들어가 온갖 고초를 당하다, 퇴각하던 인민군이 감방에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는 와중에도 살아나온 일화는 깊은 감동을 준다.
그의 부임으로 삼용교회는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64년 2월 28일 교회는 정찬회 씨를 장로로 임직했다. 그는 선친인 제1대 정재호 장로의 대를 이어 제3대 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임달호 목사는 1965년 4월 7일 삼용교회의 이름을 “삼성교회”로 변경하는 청원을 노회에 올렸다. 그동안 교회는 지역명 삼용리(三龍里)를 따라 “삼용교회”란 이름을 사용했지만, “삼용(三龍)”이란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적하는 ‘마귀’를 상징하는 ‘용(龍)’(계12:3-4) 자(字)가 포함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삼천(三川)마을과 용성(龍城)마을의 각 첫 글자 ‘삼용’ 대신 두 마을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라 “삼성(三城)”교회로 개명했다. 임달호 목사가 시무한 9년 동안 교회는 평안했고 계속 부흥했다.

임달호 목사(1대) 안지림 목사(2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