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이야기 #1
동방교회이야기
사진, 글. 김진수
다문화 가정을 품고,
다음 세대를 세우며,
지역을 섬기는 교회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가고 있던 2020년 11월 5일 오후, 오래 벼르던 교회탐방의 여정을 시작했다. 첫 방문지는 부여군 구룡면 동방교회. 5월 정기노회가 끝나자마자 시작하려고 했던 일이 코로나로 인해 계속 미루어지다 코로나가 잠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기를 기다려 서둘러 길을 나섰다. 한 해를 넘기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하면서--
(교회이야기 첫 방문교회 "동방교회" 전경/ 부여군 구룡면 동방리 소재)
마을회관 곁에 나란히 서있는 교회의 넓은 잔디마당에 필자가 들어서자 임옥자 권사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고 뒤따라오신 남편, 신승복 원로장로님과 지병으로 몸이 불편하신 김영학 원로장로님을 차량으로 모시고 막 도착한 성철안 목사님까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교육관 출입문 앞에서 함께 조우했다.
6.25 전쟁 중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동방리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진 것은 6. 25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11월 20일, 마을 안에서 좌우익 갈등으로 살해당한 주민이 20여명에 이를 만큼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홍산교회 한영수 목사가 동방리에 찾아와 첫 전도 집회를 열었고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많은 마을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아 그 중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10여명(두 원로장로 포함)이나 되었다. 그 후로 박종태씨의 대청에서 예배가 시작되었고 인근 마을 삼성교회에 시무하던 나영수 전도사(현, 대전노회 공로목사)가 주일 저녁과 목요일 밤에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함으로 동방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신승복 장로님은 19세, 김영학 장로님은 약관 15세로 교회창립부터 한결같이 교회를 지켜온 교회 역사의 산 증인들이시다.
동방교회가 위치한 동방리는 과거에는 200여 호의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100여 호 정도의 가옥이 있는 조그만 마을에 속한다. 교회가 시작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가 부흥되었으나 목회를 전담할 목회자를 모시기에는 항상 재정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교회 창립 초기에는 나영수 전도사가, 그 이후에는 교회 제직들(장옥례, 이양구, 라상갑, 김영학, 신승복 집사)이 설교를 담당했고 특히 김영학 집사는 함께 설교를 담당하던 제직들이 군 입대로, 타 지역 이사로 교회를 떠나거나 시무 목회자의 공석으로 설교자가 없을 때마다, 그 빈자리를 채워가며 무려 12년이 넘게 강단을 지켜왔다. 1954년에 이르러서야 교회를 섬길 전임 교역자들을 청빙하게 되었고 초기에 부임한 교역자(한명숙, 박태화, 이대직, 박종서 전도사)들은 어려운 중에도 희생과 헌신으로 교회를 섬겼으나 생활고로 인해 장기간 재직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 김종서 전도사는 10년 동안 신실하게 시무하며 벽돌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로를 임직하는 등,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데 헌신했다. 동방교회에 시무장로가 세워지고 담임목사가 시무하는 조직교회가 된 것은 창립 된지 30년 만인 1981년이다. 1대 담임목사인 김고안(4년) 목사를 비롯하여 고석구(5년), 김진양(준목, 1년), 강경진(7년), 서정찬(3년), 전국종(9년) 목사 등이 역대 교역자로 동방교회를 섬겼으며 현재는 2011년 9월 11일에 부임한 성철안 목사가 박갑순, 박장순장로와 함께 제 7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지역을 섬기는 교회
성철안 목사가 동방교회에 부임한 이래 젊은이들이 떠나고 난 지역의 부족한 일손을 돕고 지역에 든든한 뿌리를 내리는 역동적인 교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성 목사는 교회 울타리 안에 머물던 기존의 목회자 상을 탈피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목회철학을 “목회는 모두가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경계를 허물고 마을 속에 들어가 예수의 마음으로 온 마을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난 농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농번기에 절대 부족한 일손이었다. 규모가 큰 경작지는 기계식 영농업체에 위탁하여 농사를 짓지만 소규모 농지가 대부분인 마을 주민들은 매년 농번기 일손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일을 위해 마을에서 가장 젊은 성 목사는 마을주민과 함께 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홀로된 권사님의 비닐하우스 농사를 돕다가 나중에는 권사님의 비닐하우스를 맡아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농사짓는 일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장로님들과 논의하던 중 장로님 한분이 중고 트랙터를 구입하여 교회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지역에서 소규모 농지의 일손을 돕는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마을 사람들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고 지금은 교회가 ‘트랙터’뿐 아니라 ‘이양기’와 ‘관리기’까지 갖추고 주민들의 일손을 돕는 “소규모 영농업체(?)”가 되었다. 그래서 성목사는 ‘동방리’에서 농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제일 바쁜 사람이다.
(동방리 영농을 위해 마련한 트랙터)
그리고 동네의 일손을 돕는 일을 통해 온 마을을 심방하고, 농번기에 이웃을 섬김으로 행동으로 보이는 전도가 이루어진다.
교회의 젊은 목사가 마을 사람들의 ‘농삿일’에 뛰어들어 그들에게 필요한 일손이 되어주면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마을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마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6.25전쟁과 좌우익 갈등으로 받은 상처로 서로에 대한 마음을 닫고 살았던 마을이 교회가 세워짐으로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고 교회가 마을의 일손이 되어주면서 주민들의 삶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동방교회탐방 대담이 이루어진 교육관 건물 안에는 주민들을 위한 무료 커피숍과 어르신들을 위한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항상 열린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려는 동방교회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지역 주민을 위해 마련한 커피숍, 운동기구)
다문화가정의 센터
산업화로 인해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가면서 농어촌 지역은 연로한 노인들만 남아 어렵게 농사를 짓고 있었고 그 어르신들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더 이상 거주할 사람이 없어 버려진 마을, 옛 추억만 남은 텅 빈 마을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성목사가 동방교회에 부임했을 당시, ‘동방리’의 형편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농촌마을에 갑자기 국제결혼의 바람이 불었고 민들레 홀씨처럼 캄보디아 신부들이 바다를 건너 낯선 ‘동방리 마을’에 날아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이 외롭고 낯선 작은 씨앗들을 성목사 부인인 전미진 사모가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그녀들을 위해 한국어학당을 시작했고 동방리에 잘 정착하도록 늘 가까이에서 도왔다. 감사하게도 이 작은 씨앗하나가 동방교회의 품에 안겨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었다. 정착에 성공한 캄보디아 신부들은 부모님까지 한국으로 초청했다. 이를 통해 노인들만 살았던 마을은 젊은 피가 공급되어 온 마을에 새로운 활기가 가득한 마을이 되어갔다. 사람 떠나는 농촌지역에 젊은 새 사람들이 찾아와 미래를 기대하고 소망이 넘치는 마을이 된 것이다.

(교회의 젊은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다문화가족 교인들)
다음세대를 양육하는 교회
캄보디아 신부들이 들어와 마을에 정착하면서 동방리는 3가정의 젊은 세대가 뿌리를 내리고 사는 마을이 되어갔다. 조용했던 온 마을에 아이들의 노는 소리, 웃음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현재 그 지역 학교에 다니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수가 거의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동방리에 사는 학생들이 16명이나 되고 이 아이들은 모두 교회 안에서 신앙으로 양육을 받고 따뜻한 사랑과 배려 속에서 자라고 있다. 교회의 다음세대로 성장하는 아이들이 노인들로 가득한 교회에 항상 새 힘을 불어넣고 있다. 먼 나라에서 찾아 온 낯선 이웃들에게 교회는 다만 따뜻한 품이 되어 주었고 지금은 이들이 교회에 생기의 바람이 되어주고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인지 모른다.
동방교회를 사랑하며 헌신한 일꾼들
신승복, 이영학 원로장로님은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부터 교회의 역사와 함께해온 동방교회 첫 성도들이요, 두 분 모두 충남노회(대전노회분립이전) 목회자 양성기관인 충남신학원(판교)을 수료한 후 교회를 섬길 만큼 최선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셨다. 신 장로님은 타 지역에 근무할 때까지도 예배의 자리를 평생 지켜온 신앙의 본을, 이 장로님은 교회 강단이 공석이 될 때마다 강단을 지켜온 분들이다. 이 두 원로장로의 신앙을 현재 시무장로인 박갑순, 박장순 두 분의 장로님들이 계승하여 교회를 든든히 섬기고 계신다.
무엇보다 동방교회 70년 역사 가운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뒤에서 아름답게 헌신한 분들이 계신다. 고 박예규 집사님은 1954년 서천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동방리로 이주하여 홀로 자녀들을 키우며 줄곧 14년이 넘게 동방교회를 섬기셨다. 신실한 집사님은 자녀들을 따라 사랑하는 동방교회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시면서 그의 유일한 전 재산 논 1마지기를 교회에 조용히 바치고 떠나셨다. 이정영 집사님은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한 삶의 본을 보여주셨다. 평생 새벽기도를 빠져본 적이 없는 기도의 일군이셨는데 그 남편의 핍박이 거셌다. 밤에 교회 간다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예배드리는 아내를 예배당에서 끌어내고, 쇠스랑을 들고 교회를 쫓아와 죽이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한 번도 새벽예배를 비롯한 모든 예배를 중단한 적이 없었고 결국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그 깡패 같은 남편이 회개하고 돌아와 예수 믿은 후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기도를 다녔던 이돈행 학생의 헌신은 온 교우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종(鍾)지기가 되어 매일 새벽,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예배 종을 쳤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몸으로 교회건축을 도왔다.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학교수업 절반이상을 빠지면서 다만 교회 건축에 힘을 쏟았다. 온 교인이 감동했고 이를 통해 모두 힘을 합해 교회를 건축하는데 헌신했다. 지금 같으면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농번기에는 결석하면서 집안 농사를 돕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기에 그 어린 학생의 헌신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을 일깨웠다.
동방교회의 교회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가 시간가는 줄 몰랐고 어느새 필자의 가슴이 함께 뜨거워짐을 느꼈다.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의 생명력으로 살아서 거룩한 이 땅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리는 늦은 오후,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