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과 한 몸을 이룬 교회(2002~2019)
2002년 세광교회는 온 교인이 새로운 교회의 미래를 위해 '사랑이 있는 집'을 건축하기로 했다. 장애인들을 잠깐씩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한 몸이 되어 24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그룹 홈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1구좌 100만원, 100구좌 모금운동을 시작하자 전국 각처에서 사랑으로 동참해준 손길을 통해 1억여 원이 모아졌고 , 대전에 본부를 둔 '한국목조건축협회'의 도움을 받아 기적같이 '사랑이 있는 집'을 완공했다. 장애인 가족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많게는 13-4명, 작게는 5-6명이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장애인 그룹 홈, 사랑이 있는 집 전경 사랑의 집 식구들 사랑의 집 나들이
그러나 '사랑이 있는 집'을 건축하는 것과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다르다. 건축은 일회적이지만 운영은 끝없는 사랑과 섬김을 24시간 지속해야만 한다. 더구나 국가의 위탁시설이 아니라 모든 재정과 인력을 자급해야 했다. 재정은 모금으로, 장애인들을 섬기는 인력은 교인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인 사랑과 섬김으로 채워야 한다. 국가지원으로 해도 힘에 겨울 이 엄청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장애인 지원이 열악했던 2003년부터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제도가 확대되어 대부분의 사설 복지시설들이 이미 그 역할을 다했던 2019년 까지 지속했다. 모금은 항상 피를 마르게 하고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은 늘 지쳐 쓰러질 쯤에야 찾아왔다. 매달 빠듯한 재정 때문에 마음조이고, 자원봉사자들이 없으면 자신의 몸으로 때우고, 철마다 때마다 소문난 방문지를 함께 찾아다니며, 의사소통이 어렵고, 몸도 마음대로 안 되는 이들의 손, 발이 되어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재우고 가르쳐주고 어르고 달래며 산 세월이 16년이나 된다. 이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삶을 자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소자들인 “장애인들의 아픔을 품고 그들과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기 때문에 무모하게 시작했고 다만 그들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기에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오랫동안 지속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먼 길을 가야 예배당이 있고, 벌여놓은 일이 많고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교회는 늘 충성되고 헌신된 일꾼들로 채워지는 복을 받았다. 사랑이 있는 집을 준공한 2002년 9월 23일에는 이순자, 유영옥 권사를 임직했고, 2007년 4월 22일, 창립 23주년을 기념하여 송해성, 임성환 씨를 장로로, 임란순, 정순연, 이영미 씨를 안수집사로 임직했다. 그리고 2013년 4월 21일에는 장로 황대연 씨의 시무장로 취임과 임란순 남현자 권사임직, 윤의봉(남) 이은월, 정용순 김복희 박옥채 명예권사 추대식을 거행했다.
창조세계의 회복을 꿈꾸는 교회(2019~)
2003년부터 장애인들과 섬기는 이들이 공동생활을 해 온 장애인그룹 홈, 사랑이 있는 집 식구들은 하나 둘씩 새 둥지로 돌아갔고 끝까지 이 목사 곁에 남아있던 정신지체 자매마저 2019년 사랑의 집을 떠났다. 이제 북적이던 사랑이 있는 집은 단출한 여느 집처럼 적막이 흐를 때도 있고 때때로 넓은 잔디마당은 잔디 크는 소리가 귀에 들릴 만큼 조요하다. 세광교회는 다시 새 창조의 시원에 서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짓밟히고 파괴된 자연을 품에 안고 교회가 나서서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일과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보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5년 도시에서 떨어진 조용한 산기슭에 예배당을 지으면서 부터였다. 비교적 일찍부터 착한에너지인 태양광을 설치했고 차츰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보호하는 일에 온 교회가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남녀신도회는 각 지회별로 텃밭 가꾸기에 참여하고 있고 넓은 마당은 콘크리트 포장대신 잔디를 심어 지열발생을 줄이고 에너지를 절약하는 잔디마당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나무를 심고 녹음이 짙은 그늘아래 탁자와 연결된 일체형 목재의자들을 배치하여, 잔디마당은 모임과 공연과 여가활동의 공간으로, 주변의 나무숲 그늘은 대화와 공연 관람이 가능한 객석 공간으로 조성했다. 단순히 자연친화적인 교회를 넘어 지치고 분주한 현대인들이 쉼을 얻고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문화 창출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2020년 5월 26일, 기독교환경운동연대와 사)한국교회 환경연구소는 공주세광교회를 한국교회의 미래의 본이 되는 “녹색교회”로 인증했다.
세광교회의 잔디마당에 오면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과 평온한 안식이 가슴에 찾아온다. 이곳은 나이, 신분, 지역을 불문하고 누구든지 환영하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열린 광장이기도 하다. 이 잔디광장에서 마을주민을 비롯, 전국의 사랑의 모임 가족들과 함께하는 모든 문화적인 행사가 이루어졌다. 열린 음악회, 심장병환자 돕기 사랑의 콘서트, 지역주민 초청 경로 효 잔치(5회) 전문 음악인을 초청하는 쐐기골 가을음악회(5회) 등, 그동안 개최한 대외적인 문화행사만 36회가 넘는다. 대내적인 문화행사도 다채롭다. 마굿간 축제, 시와 음악이 있는 모임, 전국 명승지방문 야외예배 등 다양한 행사기록을 정리하기에도 좀 벅찰 정도이다.

매년 가을에 여는 쐐기골 가을 음악회
2015년 10월 18일 교회설립 30주년을 기념하여 교육관과 식당을 준공했다. 별개의 건물로 존재했던 기존의 예배당 건물과 구 식당건물 사이를 연결하고 막힌 공간을 툭 터서 예배당과 사무실공간을 제외한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통합했다. 야외 잔디마당이 “열린 문화마당”이라면 1층 현관을 들어서면서 맞이하는 넓은 실내공간은 “열린 대화마당”이다. 그곳은 책으로 둘러싸인 공주시에 등록한 “쐐기골 작은 도서관”이면서 카페처럼 꾸며져 있어서 밥도 먹고 차도마시고 세미나도 하고 강연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종탑처럼 올린 2층의 은밀한 공간에는 “세광 양지 겔러리”가 자리잡고 있다. 20평정도 되는 이 아담한 공간에는 미술, 서예작품, 십자가 조각, 서각작품들이 전시되어있는데 값비싸거나 희귀한 작품대신에 이 목사가 오랫동안 공들여 국내, 외에서 소소하게 모아온 의미 있고 따뜻한 이야기가 숨어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규모가 크고 웅장한 국립전시관만 전시관이 아니다. 시골마을의 이 아담한 겔러리도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아름답게 새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줄 수 있다. 이것이 세광교회가 새롭게 만들어가려하는 신앙과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교회의 모습이다.

공주세광교회 전경 1층의 도서관과 카페, 식당을 겸한 공간
아, 그리고 세광교회에는 교회입구에서 정면으로 태양광 패널지붕을 얹고있는 '사랑이 있는 집'도 있다. 장애인들이 떠난 그 집 1층은 목사관으로, 넓은 쉼터와 두 개의 방이 자리한 2층은 매맞고 상처받은 장애인들이 잠시 쉬어가는 쉼터로, 피곤한 길손들과 지친 이들이 찾아와 영혼의 안식과 몸과 마음까지 쉼을 얻는 “엔 학고레”로 사용되고 있다.
세광교회를 함께 섬겨온 이들
지난 38년 동안 민족의 고난과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고 주님과 함께 지난한 발걸음을 걸어온 세광교회에는 이상호 목사와 함께 동역해 준 신실한 일꾼들의 땀과 눈물의 흔적이 있다. 1998년 9월 초대장로로 임직한 고(故) 장진배 장로는 막노동과 장사로 뼈가 굵은 분이었지만, 교회와 목회자에게 큰 상처를 받고 뿔뿔이 흩어진 5명의 가난한 성도들과 함께 공주지역에 기장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을 섰고, 개척초기, 세광교회가 공주기독교연합회로부터 제재를 받았을 때, “성전최루탄난사사건”으로 공안당국과 맞섰을 때,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을 때, 항상 소수의 성도들과 함께 묵묵히 이 목사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 준 세광교회의 맏형이었다.

고(故) 장진배 장로 이상호 목사와 송해성 장로 이상호 목사와 전화자 사모
2007년 4월, 2대 장로로 임직한 송해성 장로는 세광교회에 등록한 이후 지금까지 목회자 곁에서 모든 사역에 신실하게 동행해 주었다. 학창시절에 고학으로 공부하기도 했고, 교사에서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만 붙들고 어렵게 걸어온 삶의 경험은 기꺼이 약한 자들 편에 서서 격려하는 일과, 가난한 자들을 품고 고군분투하는 목회자 곁에 섬기는 자로 있게 했다. 송 장로 부부의 오랜 헌신으로 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져 갔다. 그러나 누구보다 세광교회를 사랑으로 섬긴 사람은 이목사의 아내 전화자 사모이다. 쉼 없이 일을 만들어 시작하는 남편 뒤에는, 늘 구석구석 채 손이 닿지 못한 일들이 남겨져 있었고, 그 모든 일은 결국 아내 몫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사역은 그 얼마나 많은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가? 돕는 손길은 오지 않을 때가 많아도 돕는 일은 한시도 멈출 수 없었고 그 일은 오롯이 전화자 사모(師母)의 약한 몸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사진 속 사모님 얼굴은 기쁠 때만 반짝 웃는 ‘잠시의 미소’가 아니라, 늘 사랑으로 섬겨온 이들의 얼굴에 머무는 ‘항시의 미소’가 드리워 있다.
“행복하여라!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여(마5:7)!”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마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