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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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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찰] 백석포교회 이야기-1

김진수 2021-06-18 (금) 18:45 4년전 1066  

교회이야기9 백석포교회

 

오랜 역사가 머문 땅과

새로운 변화 앞에서

복음으로 새 역사를 일구어 온 교회

 

백석포교회 이야기를 취재하기 위해 백석포리(白石浦里)를 찾았다. 초행길이다. 아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바닷가, 오래된 어촌마을을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부터 마주친 주변의 모습은 매우 생경한 풍경으로 가득했다. 어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좁은 골목길과 오래된 마을 저 너머에 세워진 거대한 방조제와 그 곁으로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농경지, 그리고 그 주변에 조성된 대단위 공업단지에 시선을 압도하는 큰 공장들이 줄지어 서있기 때문이다.

 

큰 변화의 물결 앞에 선 흰 돌 포구(浦口)”

 

백석포리는 서해바다를 가슴에 품은 포구(浦口)에 유난히 흰 돌이 많아 백석포(白石浦)”로 불렸다고 한다. 본래 이곳에는 어선과 상선들이 드나드는 항구를 중심으로 바닷사람들과 농사짓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또한 포구를 출입하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술집, 다방, 슈퍼마켓들이 즐비하게 세워져있어서 주민들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 크고 작은 다툼이 그치지 않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1973년 아산방조제 건설로 바다를 막아 조성한 광활한 농경지가 들어서면서 그 땅을 분양받아 개간하기 위해 인근의 예산, 부여, 보령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백석포리 주변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백석포리는 처음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살았던 원주민(백석포 2)들과 바다를 막아 만든 간사지를 분양받기위해 새롭게 유입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백석포 1)으로 확장되어 250호가 넘는 큰 마을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그뿐 아니라 거대한 농경지와 함께 서해안을 낀 산업단지가 주변에 들어서게 되면서 조선시대부터 조세(租稅) 물품창고인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역사적인 땅 공세리와, 백석포리, 그리고 그 주변의 작은 마을들은 하루아침에 현대적 대단위 농공산업단지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급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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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포리 마을                  백석포리 주변 산업단지에 들어선 공장들                  아산방조제주변의 농경지

 

흰 돌 포구에 세워진 백석포(白石浦)교회

 

그러나 백석포와 그 인근지역은 급변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뿌리 깊은 선교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1890, 공세리에 세워진 공세리 성당1906년 백석포리에 세워진 성공회 성마가 성당100년을 훌쩍 넘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온 가톨릭 선교사들은 위험한 내륙지역보다는 안전한 뱃길을 통해 복음을 전했고, 이로 인해 내포지역(內浦地域-충남서북지역인 온양, 홍성, 당진, 서산)은 가톨릭교회 선교역사(歷史) 초기에 교세가 가장 강했던 곳이 되었다. 일찍부터 선교의 뿌리를 깊게 내린 가톨릭과 성공회 선교지역에 개신교회를 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러나 언제나 주의 몸 된 교회는 하나님이 그의 방법으로 앞서서 세우셨다.

 

아산방조제가 세워지면서 충남서북부 내포(內浦)지역은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고, 특히 백석포리 지역은 대규모 간사지를 분양받아 개간하려는 사람들이 새롭게 유입되면서 영적지형이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예산, 부여, 보령에서 이주해온 주민들 가운데는 이미 개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감리교선교지역인 아산지역에서 한 평신도가 교회개척의 소명을 받았다. 오영환 전도사(당시 탕정면 탕정중앙감리교회 집사)는 이미 큰 마을이 된 백석포리에 개신교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197721, 김형대씨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대한기독교감리회 백석포교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으로 구입한 전() 100평을 주님께 봉헌하고 그곳에 흙벽돌로 20평의 예배당을 짓고 그해 717일 입당예배를 드렸다. 19802월에는 최경선, 김한나 집사, 박병례, 이종애 권찰 등 첫 제직들을 임명했다. 그러나 다()자녀와 대식구를 거느렸지만 주변지역의 감리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어야했던 오전도사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온양에서 내려 맨 처음 눈에 보이는 교회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 교회가 온양교회였고 고() 이선주 목사는 오전도사의 내민 손을 잡아주고 매달 성미 쌀 1가마씩을 보조했다. 이를 계기로 오전도사와 백석포교회는 19771231일 우리교단에 가입했고 19794월 정기노회에서 교회설립인준을 받았다. () 이선주 목사의 그늘이 아직도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품이 넓어 주변의 어려운 여러 교회들을 초교파적으로 도우면서 자리를 잡지 못한 교회들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가톨릭과 성공회의 교구였던 흰 돌 포()에 세워진 백석포교회는 이렇게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감동하시고 이끄심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e7e93c250e77fc0ca67d6a872fd79b61_1624009082_24.jpg       백석포교회 전경(좌-교육관  중-예배당  우-사택)                               예 배 당 내부 모습

 

백석포교회를 섬겨온 목회자이야기

 

복음전도에 큰 열정을 가졌던 오영환전도사(1977.2.1.~1980.2.1)는 백석포지역에 첫 개신교회를 세운 개척자로서의 사명을 마치고 19802월 차기 목회를 기장교단 목회자에게 위임한 후 훌훌 교회를 떠났다. 여성목회자지만 당당한 성품의 정미현 전도사(1980.2.8~1984.5.11)는 백석포교회의 2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4년여 동안 술과 노름, 우상으로 찌든 지역의 교인들을 강한 리더십으로 훈련하여 몇 안 되는 소수지만 견고한 믿음의 사람들로 세웠다. 3대 교역자, 이광수 전도사(1984.6.4.~1988.10.13.)는 갓 결혼한 신혼으로 교회에 부임하여 그의 젊음의 시간을 첫 목회와 함께 신학대학원 수학, 교회건축 등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그의 재임 중, 소수의 교인들과 함께 협소한 흙벽돌 예배당을 헐고 40평 예배당 건축하는데 백방으로 힘썼는데(1988.8.15 입당) 건축업을 하는 그의 외삼촌 이현우 장로(온양장로교회)의 협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광수 전도사는 19888월 목사안수를 받은 후 새 임지로 청빙을 받아 교회를 떠났고 그 뒤를 이은 최재선 전도사(1988.11.28.~현재)가 제 4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최 전도사는 5년 간 충남노회 내동교회 전임전도사의 사역을 마치고 백석포교회로 부임하여 현재까지 33년 동안 교회의 부흥을 이루고 백석포 지역을 대표하는 개신교회로 우뚝 세워지도록 성심으로 헌신했다.

 

외딴 섬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

 

최 전도사가 부임하여 첫 예배를 드리는 날, 9명의 교인들이 자리에 함께했다. 수도 작았지만 모인 교인들은, 신앙과 삶이 말씀과는 동떨어져 있었고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는 낯선 이들처럼 보였다. 더구나 백석포리에는 오랫동안 이 지역의 역사와 함께 마을의 중심이 되어온 공세리 성당성공회백석포교회가 뿌리 깊은 거대한 나무처럼 자리 잡고 있었고 백석포리가 속한 아산지역은 본래 감리교선교구역으로 교세가 강한 감리교회들이 백석포 지역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최 전도사에게 백석포교회는 협력할 사람도 마음을 터놓고 의논할 동역자도 주변에 보이지 않는 고독하고 외딴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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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리 성당(1890년)                                                                   성공회 백석포교회(1906년)

 

홀로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고 외롭게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이 지역에 보내신 뜻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그리고 차츰 두려움은 걷히고 이 지역에서 백석포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가 하나씩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공세리 성당성공회 백석포교회가 드리는 전통적 예전 중심적 예배와 조상제사와 주초문제를 금하지 않는 개방적인 입장은 그 지역의 나이든 노년세대들이 접근하는 데는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에게는 예전적인 예배가 매우 고답적인 전통으로 보일 수 있고, 무엇보다 오랜 세월동안 그 지역에 충분히 뿌리를 내렸다는 자부심 때문에 젊은이들과 새롭게 이주해 온 이주민들 곁으로 살갑게 다가가는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백석포지역의 젊은 세대들은 그 지역의 첫 개신교회가 문을 열고 다가와 줄 뿐 아니라, 말씀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찬양을 통해 위로와 새 힘을 얻으며, 뜨거운 기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는 생동감 있는 개신교회를 향해 마음을 열었다. 특히 충남의 부여, 예산, 보령에서 온 이주민들의 호응이 컸다. 부임한 후 5년여 동안(1988~1993) 쉼 없이 마을을 다니며 열정을 다해 복음전도에 힘썼다. 특히 20-30대 젊은이들을 집중해서 전도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백석포 1,2리 지역의 20-30대 젊은 세대의 대부분이 백석포교회의 교인으로 등록했다. 교회는 9명의 교인에서, 100여명을 넘어서는 교인들로 북적였다. 백석포교회의 역사가운데 가장 놀라운 부흥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또한 전도와 병행해서 젊은 성도들을 양육하는 말씀훈련을 실시했다. 매년 52주 신앙훈련 교재를 가지고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가르쳤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들을 세우는데 온 마음을 쏟았다. 이때 전도된 젊은 교인들이 지금은 60대로 여전히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최 목사에게 고독한 외딴 섬이었던 백석포가 잘 익은 곡식으로 풍성한 가을 들녘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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