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2월 1일 홍산유치원 설립 발기인대회를 홍산교회당에서 열었고(지방유지 4인 - 김종인, 이희철, 최신모, 백만기, 교회대표 2인 : 이춘원 목사, 백남철 장로), 4월 5일 홍산유치원 개원식을 홍산교회당에서 거행했다, 교사는 은보주 선생(전주 남문외 보육원 졸업), 모집된 유치원생은 20여 명이었다. 홍산교회는 취학 전 어린이에 대한 서구 선진교육의 경험을 교육 전문 선교사들에게 전수받아 2년 동안 유치원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고 육성한 후, 1933년 4월 26일 유치원 운영권을 홍산 지역사회로 환원했다.
2. 청년 면려회와 관악 전도대, 소년 면려회
홍산교회는 1931년 6월 1일 기독 청년들의 단합과 친목, 지역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청년 면려회를 조직하여, 주일 오후, 별도로 청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청년회가 활성화 되면서 당시 전북노회 진흥부(노방전도, 부흥사경회 집회) 책임자였던 부위렴 선교사의 도움으로 홍산교회 ‘청년 관악전도대’가 구성되면서 홍산, 부여, 서천 지역의 전도부흥집회와 교회행사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관악 전도대가 연주하며 시내를 돌면 온 시내가 들썩였고, 전도 집회가 시작되면 말씀에 앞서 찬양을 인도해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홍산교회 청년 면려회가 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감당하면서, 이번에는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유년 면려회(후에 소년회, 학생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부위렴 목사에 의해 창립된 당시의 관악전도대 신축한 교회당(1차)과 박종서 장로임직
3. 김익두 목사 부흥사경회
교회가 그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던 3.1운동 이후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면서, 깨어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한국교회의 대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부흥사경회를 통한 부흥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침, 이춘원 목사가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1931년 9월 18일부터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자 홍산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교인들은 은혜를 받아 가슴이 뜨거워졌고, 교회는 기도와 전도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4. 제1차 교회당 건축
홍산교회가 전도하며 지역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주일학교로 부터 솟아나기 시작했다. 1932년 5월 주일학교 예배 중, “바람만 조금 불어도 교회당이 흔들리니 교회를 짓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어린이 입에서 나오면서 교사들이 “매달 첫 주, 어린이 연보를 건축 연보로 드리기로 결정”했고, 어린이 주일학교의 건축 연보 소식이 순식간에 온 교회에 알려졌다. 홍산교회는 교회당 건축에 하나님이 친히 일하신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고, 1933년 1월 1일 당회를 통해 “이는 온 교인들 경성케 할 징조”라며 매월 첫 주일 헌금을 건축 연보로 드리기로 했다. 1934년 11월 4일 공동의회에서 전 교인이 일시에 건축 연보를 드리기로 결의한 후 490여 원이 모아졌고, 1935년 2월 11일 열린 공동의회는 5간의 낡은 초가 교회당을 헐고, 12간의 목조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건축위원으로 이춘원 목사, 백남철 장로, 최봉선 집사를 선임했다. 어린이들로부터 시작한 교회당 건축은 1935년 8월 5일, 총건축비 633원 20전을 드려 완공되었고 1935년 12월 8일, 교회는 기쁨으로 성전 낙성식 및 헌당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홍산교회가 교회당 건축을 마친 후, 이춘원 목사는 “섭섭하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갑자기 홍산교회를 사임했고 이로 인한 교인들의 상실감은 매우 컸다.
흑암의 시대, 시련의 골짜기를 넘어(1936년~1947년)
이춘원 목사의 사임 후, 사회적인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은 세계 제국으로의 확장을 꿈꾸며 1937년 중일전쟁, 1939년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2차대전을 일으켰고, 내부적인 단합을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장로교 총회는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조선총독부는 찬송가의 불온한 가사의 삭제, 구약성경과 계시록의 설교 인용의 금지, 선교사들의 강제 출국, 신학교, 기독교계 학교들을 폐교했다. 심지어 조선 교회들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병합하고 이에 항거하는 200여 교회를 폐쇄, 2천여 성도의 투옥, 50여 교역자는 순교했다.
1. 7년의 암흑 시기(1936년~1942년)
홍산교회는 이춘원 목사가 떠난 1935년 12월부터 1942년 정규태 목사가 홍산 지역 5 교회 당회장으로 활동하기까지 7년여 동안 목자도 없이 일제의 교회 탄압으로 교회를 떠났거나, 잠시 신앙생활을 중단한 교인, 목자 없이 방황하는 교인들이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연혁에 “1938년 4월 9일, 임현숙 전도부인 사임하고 안신영 씨가 시무”했다는 기록을 보아, 이 시기에도 여전히 임현숙 전도 부인의 뒤를 이어 안신영 전도 부인이 시무하고 있었으며, 백남철 장로는 교인의 대표로 교회를 돌보며 노회와 총회도 충직하게 참여하고 있었고 신실한 성도들이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지켜 온 것으로 보인다.

이춘원 1대 담임목사 정규태 목사 한선수 목사 한영수 목사 고재호 2대 담임목사
2. 정규태 목사의 당회장 치리 시기(1942년 ~ 1945년)
7년의 암흑시기를 지난 후, 정규태 목사가 1942년 ~ 1945년 12월까지 홍산교회 등, 홍산 지역의 5개(홍산, 홍연, 홍양, 삼용, 반교) 교회를 순회하는 당회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해방이 되던 1945년 11월 7일 홍산교회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장로 1인 가택을 노회에 청원했고, 정규태 목사는 청포교회의 청빙을 받아 홍산 지역 5 교회 당회장 직을 내려놓았다.
3. 한선수 전도목사 부임과 시련의 시기(1945년 ~ 1947년)
민족의 해방과 함께 일제의 핍박으로 교회를 떠났던 성도들은 돌아오기 시작했고, 미군정(美軍政)과 이승만 정권 초기 시절,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 30일 홍산교회는 공동의회(의장 임달호 목사)를 열어, 한선수 전도사의 홍산, 삼용교회 겸임 목사 청빙을 의결했다. 그리고 1946년 4월 17일 한선수 전도사는 충남노회 제2회 정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홍산교회에 부임했다. 한 목사는 모든 사람을 격의 없이 대했으며 맡은 일에 열정적이었고 때때로 성주산 기도원 산봉에 올라 기도하기를 힘썼다. 그러나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의욕이 너무 커서 교인들이 따르기 힘들어할 정도였다고 한다. 홍산교회는 1946년 11월 18일 이봉희 씨를 제2대 장로로 임직했다. 교회는 점점 안정되었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홍산교회는 세대수 74호 예배 참석자 130명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1947년 7월 4일 한선수 목사가 황산교회의 청빙을 받아 교회를 떠나면서, 노회에 백남철 장로에 대한 징계를 청원했기 때문이다. 충남노회는 임시회를 열어 특별위원 5인을 세워 조사한 후, 백남철 장로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다. 목자는 사임했고, 그동안 교회를 지켜 온 장로는 정직을 당하자, 교회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교인 간에 보이지 않는 불신이 생겼고, 성도 간의 내적 갈등과 반목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홍산교회가 직면했던 가장 큰 시련이었다.
이춘원 담임목사 취임과 전쟁의 위기 속에 피어난 순교 이야기(1948년 ~ 1960년)
위기(危機)는 항상 새로운 기회(機會)이다. 홍산교회는 첫 전도목사로 시무하며 교회의 큰 부흥을 이끌었던 이춘원 목사를 다시 홍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일에 이심전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1948년 5월 12일, 이춘원 목사는 홍산교회의 첫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1. 백남철 장로 복직
이춘원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백남철 장로에 대한 노회에 복직 안을 제출했고 1948년 4월 6일 노회는 백남철 장로의 복직을 허락했다. 정직 후 9개월 만의 일이었다. 백 장로가 복직되면서 교회는 그동안 서로 소원했던 성도들의 관계가 다시 화해와 일치의 분위기로 바뀌었고 실망과 낙심으로 교회를 떠났던 성도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947년 7명이던 제직 수는 1948년 15명으로, 1948년, 49년 세례 학습 교인의 수는 각각 28명, 23명이나 되었다.
2. 6.25 한국전쟁과 뿌리 깊은 나무
6.25 한국전쟁은 한민족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갈등과 상처를 안겨주었고,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홍산교회는 온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고, 지역사회를 섬기며, 아름다운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순교의 열매를 맺은 시기이기도 했다.
가. 사랑으로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교회
무엇보다 홍산교회와 이춘원 목사가 지역사회에 깊은 신뢰의 뿌리를 내린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인민군들이 홍산 지역에 들이닥치면서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춘원 목사의 생명이 위급해지자 홍산 지역의 백정들이 교회의 사택으로 몰려와 밤낮으로 보초를 서주었고 이로인해 이 목사는 기적처럼 그의 생명을 건졌기 때문이다. 교회와 지역사회가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신뢰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