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노회 선교의 그루터기 청포교회 이야기
눈부신 석양과
붉게 물든 금강이
마당 앞에 펼쳐지는 교회
언덕위에 있는 청포교회를 찾는 이들은 비좁고 구불거리는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그러나 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면 금강의 아름다운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저녁이 되면 석양빛으로 붉게 물 드는 저 금강 물줄기를 따라 강경포구로 수많은 상선들과 어선들이 몰려왔고 또 그 강물을 따라 116년 전, 부여의 시골마을 청포리에 복음을 든 선교사들이 찾아왔다. 청포(菁浦, 강가를 바라보는 마을)교회 앞마당에는 매일 지난 세월의 흐름을 비쳐주는 노을 지는 석양과 그 아래 비옥한 토지를 품고 흐르는 금강이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이곳에서 충남, 대전노회 선교의 그루터기인 청포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청포교회 앞마당에서 바라본 석양과 그 아래 금강에 비친 해, 그리고 그 아래 금강 변
하천에 펼쳐진 비닐하우스의 모습은 116년 청포교회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청포교회가 세워진 강경지방은 본래 미국 침례교에 의해 선교가 시작된 곳인데 1902년 칠산침례교회(한국 최초 침례교회)에 다니던 고내수, 고문중 등의 몇몇 신자들이 부여군 양화면에 초왕교회(오량교회 전신)를 설립하고 교회의 재정보조를 캐나다 침례교 선교부 대신 미국 남장로교 군산 선교부 불(W.F. Bull, 부위렴)선교사에게 요청했다. 초왕교회 교인들은 배를 타고 금강줄기를 오가며 순회의료선교를 하고 있던 드루(A.D. Drew) 선교사를 통해 미 남장로교 군산선교부와 구암의료센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불(부위렴)선교사는 이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자신의 선교구역처럼 돌보았고 그 후로 충남지역은 미 남장로교 선교구역에 편입되었다. 특히 초왕교회 신자 중 청포리에 살고 있던 정영태, 오기선, 백공범 등은 마을의 교인들이 늘어나자 1905년 3월 20일 정만종씨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1906년 9월경 예배당 6칸을 건축하여 청포교회 예배당을 세웠다. 정영태, 오기선은 1907년 군산선교부 부위렴 선교사 대리인 업아력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7년간 교회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눈부신 석양, 붉게 물든 금강
저녁이 되면 청포교회 앞마당에 깃든 석양처럼 오랫동안 마을과 지역을 넘어 민족과 교단을 섬겨온 아름다운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교회 정문 옆에는 창립60주년 기념비와 100주년 기념비가 나란히 서있고 교회 입구에 세워져있었던 3.1독립운동기념비는 지금은 교회를 울타리를 넘어 마을의 중심지역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청포교회가 그동안 이 민족 역사와 함께 호흡하고 민족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며 오랫동안 부여군 청포리 지역을 품고 살아 온 증거들이다.

좌로부터 1. 교회입구(O표)에 있는 교회창립기념비 2. 60주년 기념비 3. 100주년 기념비 4. 3.1독립운동기념비
부위렴 선교사(1905-1907)에 이어 하위렴(W.B. Harison 1907-?) 선교사가 청포교회를 치리할 당시 예배 인도자였던 정영태, 오기선은 농촌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설립했다.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를 강조한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따라 초창기의 한국교회는 교회설립과 함께 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의 정식 학부인가를 얻은 “창영학교”는 1910년 6월 13일 부여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기독교 사학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학교 임창섭교사를 중심으로 부여, 강경지역의 첫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임창섭 선생은 전북출신으로 교사 봉급의 절반을 담당해주는 군산의 남장로회 선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마침 군산 영명학교 학생 강금옥으로부터 3.1만세운동에 대한 연락을 받고 청포교회 교인들과 창영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거사를 계획했다. 고상준, 추병갑, 김종갑, 추성배, 서삼종씨 등이 주동이 되고 강 건너 강경지역 인사들과 협력하여 1919년 3월 10일 오전 10시 강경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로 인해 다수의 교회, 학교 인사들이 체포 구금되고 그 중 10여명이 징역 2년에서 3개월까지의 실형을 언도받고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강경, 부여지역의 삼일독립만세운동으로 창영학교 교사들과 교회지도자들은 체포되고 창영학교는 폐쇄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예배는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없었고 일부 교인들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를 멀리하기도 했다. 교회는 이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노회에 목회자 청빙을 제의하였고 1922년 청포교회 최초의 담임목사인 최상섭 목사가 부임하여 군산선교부의 해리슨(하위렴) 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섬겼다.
해방 이전, 청포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
첫 담임목사인 최창섭 목사가 1922년 청포교회에 부임한 후 삼일만세운동으로 인해 어려워진 교회와 폐교된 학교는 수습되기 시작했다. 1923년 김진규 장로, 1925년 백공덕 장로를 장립하였고 장산교회(성산)와 합병하여 예배당 4칸을 증축(ㄱ자 예배당)하였으며 폐교된 창영학교에 이은 “창영여자의숙”을 1922년에 세워 더욱 거세진 압박 속에서도 기독교사학을 통한 국민계몽 운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최창섭 목사를 이어 시무한 이춘원 목사(1930-39, 1941-43)와 그의 아들 이재봉 목사(1939-40)는 청포교회 시무와 함께 충남지방 전도목사로 활동하면서 1937-39년에만 세례교인수를 배 이상으로 성장시켰고 1941년에는 송병윤 장로를 장립했다. 이 시기에 청포교회를 위해 헌신한 숨은 일꾼들이 많았는데 유경애, 이마리아 전도부인, 백선경 권사가 그들이다. 이들은 온 힘을 다해 지역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전도와 결신에 힘썼다. 그 뒤를 이어 해방이 될 때까지는 최석철 목사(1943-45)가 청포교회에 시무했다.
청포교회 초기에 교회기초를 놓고 헌신한 선교사들의 살신성인의 공(功)은 지대했다. 의료선교사 드루(유대모)를 비롯하여, 선교사 불(부위렴), 해리슨(하위렴), 전킨(전위렴) 등이 직 간접으로 청포교회와 연관이 되어 있었고 감추어진 조선 땅, 충청도 부여지역까지 찾아와 복음의 씨를 뿌렸다. 선교사역중에 얻은 과로, 풍토병,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문화충격을 이겨내고 자신의 목숨을 이 땅에 묻으면서까지 이 땅을 사랑하며 헌신했다. 해방이전까지 이들의 수고와 희생으로 청포교회의 믿음의 터는 굳건해져 갔다.

해리슨(하위렴) 선교사의 전도여행 순회의료선교사 드루와 돛단배 최창섭 목사 이춘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