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의 도읍 홍산에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첫 열매
홍산교회 이야기
부여읍 홍산면(鴻山面)은 삼국시대 이후, 충남 서해안지역의 보부상(褓負商)들의 거점 지역으로 유명했다. 보부상(褓負商)은 도로 교통이 발달 되기 전,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물품 유통을 담당했던 상인(商人)들이었는데, 비단, 인삼, 옷감 등, 값비싼 상품을 큰 보자기에 싸서 운반한 보상(褓商, 봇짐장수)과, 농산물, 생선, 소금, 수공업품을 지게로 져서 운반했던 부상(負商, 등짐장수)을 합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특히 홍산의 보부상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유명한 한산모시 생산지인 “한산, 부여, 서천, 은산, 홍산, 비인, 남포, 임천” 등 8개 읍에 설치한 “저산팔읍상무사(苧産모시八邑商務社)”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고 홍산에 큰 “장시(場市)”를 세우면서 충남 서부 지역의 상권을 확장해 갔다.

부위렴 선교사 옛 홍산현 관아에서 바라본 홍산면과 홍산교회
1. 보부상의 도읍 홍산에 세운 첫 장로교회(1906년 ~ 1924년)
홍산이 일약, 충남 서부지역 상권의 핵심으로 부상하자 많은 사람들이 홍산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충청도 금강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새로운 물류 중심으로 떠오르던 홍산 지역 선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홍산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때는 차츰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가. 부위렴 선교사의 홍산 전도(1906년)
마침, 호남과 군산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남장로교회 부위렴(William F. Bull, 1876-1941) 선교사가 금강 줄기를 타고 충남 서천과 부여 등, 서해안지역에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는데, 홍산이 충남 서해안지역 상권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그곳에 새로운 교회를 세울 계획을 했다. 1906년 4월경, 부위렴 선교사는 박성화 전도사, 그리고 홍산 전도의 첫 열매인 김운순 씨(홍산면 좌홍리)와 함께 홍산 지역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홍산에 미국 선교사가 나타나 복음을 전하자 그 반응은 뜨거웠다. 김순진, 고영하 등이 그 대열에 합세했고, 한순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큰 성장을 이루었다. 홍산교회사에 따르면 “처음에 교회는 순수한 감정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일취월장 성장하여 갔다.” 고 전한다.
나. 교회에 닥친 첫 시련과 은혜(1906년 ~ 1924년)
그런데 갑자기 교회에 시련이 닥쳐왔다. 큰 부흥 중에 “일부 성도들이 신앙의 양심이 타락하여 교회를 배반하고 세상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홍산교회 백년사”에서는 이를 “배교행위”였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충남노회의 산증인 중 한 분인 정규태 목사는 그가 쓴 ‘충남노회사’에 서, 한국선교 초기 교회에 들어온 교인 중 일부는 “신분 상승과 안전”을 목적으로 입교한 이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지방의 감사나 군수라도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는 형국이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적 이득을 얻기 위해 교회에 들어와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맺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때,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나면서 교회를 욕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유로 홍산교회는 창립 초기에 큰 난관에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홍산 좌홍리 교회에 닥친 이 위기가 오히려 그 신앙적 기초를 바르고 든든히 하는 데 큰 유익이 되었다. 홍산에 거주하면서 홍산보다 먼저 세워진 “홍양교회(1904년 창립)로 출석하고 있던 백낙운, 백남철씨 등이 이 일로 좌홍리 교회에 합류하여 좌홍리 교회의 새로운 그루터기 성도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운순 씨의 가택에서 모였던 예배처를 김재련 씨의 사랑채로 옮겨, 독립된 예배 공간을 마련했고, 새롭게 합류한 박태식, 신태학, 최봉선, 이춘근 씨 등이 함께 모여 눈물 어린 기도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매일 저녁마다, 모여서 기도하고 신령한 은혜를 받아 상처가 치유되고 일부 성도들의 배교의 충격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 교회의 부흥과 교회당 매입(1925년 ~1930년)
매일 저녁 예배와 기도로 새 힘을 얻은 좌홍리 교회는 이제는 교회 부흥과 교회당 건물을 위
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5년 8월 10일 홍산면의 중심지였던 북촌리 324번지(현 위치)에 소재한 가옥 5간 1동을 60원에 매입하고, 90원을 드려 수리한 후, 교회를 이전했다. 이듬해인 1926년 봄에는 “십자가 달린 종탑”을 60원을 들여 세웠고, 8월에는 군산에서 활동하던 부위렴 선교사와, 후에 그의 아내가 된 알비(Alby E. Bull) 선교사를 강사로 홍산면 사무소에서 연 “장막 대전도 집회”를 개최하여 구도자 수십 명을 얻었다. 무엇보다 1926년 가을, 교회가 창립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전북노회 전도국장 황재삼 목사의 집례로 홍산교회의 첫 제직 임명과 성찬식을 감격 속에서 거행했다. 이날, 백남철 성도가 영수로, 최봉선, 이춘근(남), 임신구(여) 성도가 서리 집사로 임명되었다.
1927년 5월 15일에는 1년 전, 전도집회 강사로 방문했던 군산 선교부 학교전문 선교사 알비(Alby E. Bull)와 두애란(Dupuy, Lavalette) 선교사를 초빙하여 일주일간 부흥사경회를 열고 주간에는 사경회, 야간에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22일 주일에 두 선교사의 인도와 장유복, 박인규 양의 조력으로 유년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교사들을 임명했다(교장 : 백남철 영수, 서기 : 박인규, 교사 : 장유복, 최영근, 이신길, 임신구, 송정희).

60원에 매입한 초가 5간 첫 예배당(여신도 연합회 모임) 백남철 장로(1대)
라. 장로임직과 첫 당회 구성(1930년 4월 13일)
1930년 4월 12일 홍산교회는 교인 대표로 백남철 영수를 초대 장로로 세웠다. 부위렴 선교사가 여러 교회의 당회장으로 순회하며 치리하던 데에서 이제는 임직 장로가 교인의 대표가 되어 당회장과 협의하여 홍산교회를 치리하게 된 것이다. 당일 오후 8시 전북노회 군산지방 서북시찰회가 홍산교회에서 모여 피택장로 시취(試取)를 한 후, 주일인 다음 날(4월 13일), 시찰위원장 김성원 목사의 인도로 백남철 장로 임직식을 거행했다.
백남철 장로는 교회의 설립 초기에 찾아온 시련을 이겨내고 기도로 교회 부흥을 일으켰으며 주일학교가 조직되자 첫 교장으로 섬겼고 교인 대표로 노회에 참석하고 총회 총대로 평양, 신의주,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을 다니며 노회와 총회를 섬기는데도 힘을 다했다.
마. 홍산교회를 섬긴 여 교역자들(1928년 ~ 1940년)
1928년 2월 9일, 홍산교회는 전운 전도부인(1928~1931)을 전임교역자로 청빙하여 복음 전도와 교회성장을 위해 힘썼고, 그해 8월 5일, 교회 봉사와 전도의 중심축인 여(女) 면려회(여신도회)를 조직하고 제1기 회장으로 초기 여신도회를 앞에서 이끌기도 했다.(회장:전운, 총무:임신구, 서기:박정애, 회계:구즉회) 1932년 6월 3일에는 전운 전도인의 후임으로 유선열 전도인이 부임하여 교회를 섬겼고(1932~1933), 그 후에도 박현숙 전도인(부임일자 미상~1938)과 안신애 전도인(1938~)이 그 뒤를 이어 홍산교회를 섬겼다. 전임교역자를 청빙하기 어려웠던 교회 설립 초기, 홍산교회는 백남철 장로가 교역자의 역할을, 기도로 무장한 네 전도 부인들이 심방과 전도로 교회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이춘원 전도목사와 교회 성장 시기(1930년 10월 ~ 1935년 8월 5일)
홍산교회가 안정되고, 성장하면서 담임목사에 대한 갈망이 커졌고, 재정적인 독립이 어려운 두 교회가 연합하여 한 목회자를 청빙했던 당시의 관례를 따라 1930년 6월 11일, 가까운 홍연교회와 연합하여 이춘원 목사를 전도(겸임)목사로 청빙했다. 이춘원 목사는 1930년 10월 8일 부임하여 1935년까지 5년 동안 홍산, 홍연교회의 겸임 목사로 교회를 부흥,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가. 홍산지역에 세운 첫 유치원(1931년~1933년)
이춘원 목사는 부임 직후 유아교육을 위해 힘을 쏟았는데, 당시 홍산 지역에서는 유치원 교육의 필요성은 절감하고 있었으나 전문 교사의 부재, 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 부족, 교육기관의 정책 부재 등으로 유치원 설립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