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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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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찰] 화수교회 이야기 - 1

김진수 2021-07-29 (목) 10:25 4년전 848  

교회이야기 10 화수(花樹)교회 이야기

 


꽃마을에 활짝 핀 꽃봉교회 이야기


화수리(花樹里)는 마을 지형이 항상 꽃이 만개한 것 같다하여 화중개(花中開), 화징개, 화중(花中), 꽃봉마을로 불렸다고 한다. 화수리를 화중개(花中開)로도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화수교회를 찾은 날, 교회입간판을 따라 동네를 향하는 입구에 들어서자 아하! 절로 탄성이 나온다. 화중개(花中開)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화수1,2 마을을 품고 서로 마주 보는 산자락에 아름다운 봄꽃()이 무리를 지어() 한꺼번에 만개()하면 화수리 전체가 활짝 핀 한 송이 꽃()처럼 보이고 그 꽃무리 가운데()로 세도북로와 화수천이 흐르며 활짝 열려있는() 곳에 두 마을이 있어서 화수리는 꽃무리 속에 둘러싸인 동네, 화중(花中)마을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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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즈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화수리와 마을 입구에 세워진 화수교회(붉은색 원)

 

꽃봉마을에 뿌려진 복음의 씨(19271)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서울이나 부산 등 대 도시나, 해상교통 요지인 인천, 군산, 목포 등 해안도시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아 그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회를 조직했으며 그 선교회를 중심으로 중소도시나, 교통이 원활한 지역으로 선교를 확대해 나갔다.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은 부흥을 거듭했고 한국인 교역자, 평신도들은 교회가 없는 농어촌 지역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으며 거리가 먼 지역의 교인들을 분립하여 쉼 없이 마을마다 교회를 세워갔다.

 

이와는 달리 화수리에 뿌려진 첫 복음의 씨앗은 매우 특별한 경로로 전해졌다. 아담한 화수 1,2리 마을에는 60여 가구 180여명이 모여 산다. , 가을에 시인과 묵객들이 찾는다는 꽃봉마을에 19271월 투병생활로 지친 한 과객(過客)이 요양차 화수리를 찾았다. 성낙소 목사! 그리스도교회 창시자로만 알려진 그 과객은 3년여 년 동안 화수리 처가에 머물며 처가식구들과 마을의 몇몇 분들을 모아 유승예씨(현 조용희 원로장로의 모친)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 후 3년간의 요양을 마치고 서울로 떠났다. 한 병약한 목사가 뜬 구름처럼 갑자기 찾아와 잠시 머물다 간 그 자리에 작은 복음의 씨들이 흩뿌려졌다. 화수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한 목사의 피병(避病)을 통해 임했던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19271~ 19761)


화수리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지만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교인 수()나 마을의 규모도 작았을 뿐 아니라 화수리 인근에 이미 오래 전에 세워진 교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낙소 목사가 갑자기 서울로 떠난 후, 목자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화수마을의 교인들 중, 신신자, 유승예 등은 마침 화수리와 인접한 청포리 교회에 출석하는 안야순 권사를 따라 청포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수요예배는 유승예의 집에서 그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다. 화수리 교인들이 도보로 1시간 반이나 소요되는 길을 눈, 비를 맞아가며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부지런히 교회를 섬기는 모습은 청포교회의 신앙생활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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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포교회의 첫번째 초가 예배당과  두번째 "ㄱ"字 예배당 


청포교회가 부흥을 거듭하면서 교회의 주변 마을인 청송, 화수, 사산 등지에서 출석하는 원거리 교인들이 늘어났고 1951년 박상내, 안야순, 문선철, 이사순, 유인석, 유인욱 등, 청포교회에 다니던 청송리와 화수리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부락이 큰 청송리에 청송교회(현 세도교회)”를 세웠다. 청포교회사에 따르면 당시 청포교회 김진규 장로는 교인도 몇 명 안 되고 교역자와 예배처소도 없다는 점을 들어 교회분립의 불가함을 역설했으나 박상내 씨(안야순 권사 부군)방죽파면 개구리가 모인다는 속담을 들어 적극 분립을 주장했다고 한다.(청포교회사, p78-79) 화수리 교인들은 청송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며 섬겼다. 청송교회로 가는 길도 여전히 멀고 험해서 여름이면 발이 물에 빠지고 겨울엔 꽁꽁 언 발로 50여분 넘게 걸어 다녔지만 주일 낮, , 수요 밤은 물론 새벽기도까지 빠지지 않았다. 화수리 교인들은 항상 담임목사 사택과 교회에 필요한 땔감을 주중에 마련해 놓고 주일이 되면 예배시간 맞추어 지게로 날라다 드린 후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지금도 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세도교회(옛 청송교회) 강경수 장로는 당시 화수리 교인들의 교회사랑과 그 헌신적 열정을 세월이 지났어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청송교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화수리 지역에서 전도된 교인들도 늘어났으며 장로로 임직되는 분(조용옥 장로)도 생겼다. 그러나 도보 외에는 특별한 교통수단이 없었던 당시의 화수리 교인들은 여전히 원거리를 오가는 고통을 참아가며 신앙생활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래서 당시 청송교회를 담임했던 박준철 목사는 원거리에서 다니는 교인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를 분립해 주려고 화수리 교인들의 헌금을 따로 모으기까지 했다.


청송교회를 다닌지 25년째 되는 해(1976), 화수리 교인들은 큰 믿음의 결단을 내렸다. 사랑하며 섬겼던 청송교회를 떠나 화수리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화수리 지역을 효율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지역 내 교회설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61월 첫 주, 조용옥장로를 비롯한 조용욱, 조준영, 임승백, 황태춘, 조용희, 윤용식, 임병완씨 등, 화수리 교인들은 귀덕리 임씨 종산자락에 있는 구옥(빈집)을 매입하여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충남노회 제 32회 정기회(19764, 장항교회)에 교회분립을 청원하여 422일 설립허락을 받았다. 30년 넘게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청포교회로, 청송교회로, 그리고 마침내 화수리에 그 터를 내리고 화수교회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화수교회의 새 역사 45(19761~ 현재)


마을교회를 세우고 싶어 했던 오랜 열망이 30여년 만에 꽃을 피웠다. 청포, 청송교회를 섬길 때 최선을 다했고 막상 새 교회를 세울 때 손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다. 교회창립에 앞장섰던 조용옥 장로가 먼저 천수답 2마지기를 제외한 옥답 4마지기 전부를 주님께 바쳤고 그의 동생 조용욱 집사는 논 두 마지기를 드렸다. 모든 교인들이 힘을 다해 건축헌금에 동참했다. 마을 사람들까지 나서서 쌀 1말씩을 거출하여 백미 3가마를 헌금했을 뿐 아니라 건축 기간 내내 돌아가며 필요할 때마다 돕는 일손이 되어주었다. 화수교회의 첫 41평 예배당은 온 교인들의 뜨거운 헌신과 마을사람들의 손길이 모아져 건축되었고 첫 예배를 드린지 6개월 만인 19766월에 헌당식을 했다. 교역자 사택을 건축하는 데는 세도교회의 강희준 장로의 도움이 컸다. 그는 세도교회 장로로, 새로 분립한 화수교회 사택을 건축하는데 시멘트와 기와 등 건축자재를 사비로 도왔다. 임병완 권사는 백미 3가마를 헌금했고 교인들은 냇가에 있는 모래를 채취하여 손수 벽돌을 찍고 합심하여 11평 사택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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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교인들의 헌신과 마을 주민들이 협력하여 건축한 화수교회 첫예배당과 목사관 , 1982년 완공한 교육관 


백길현 전도사(1976.8~1980.3)19766월 화수교회에 첫 목회자로 부임했다. 백전도사를 중심으로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지역선교와 교회부흥을 위해 전심으로 힘썼다. 교회는 차츰 성장했고 197810월 화수교회 창립이후 처음으로 조용욱, 이은순, 임병완, 안경자씨를 권사로 임직했다. 19805월에 부임한 엄기수 전도사(1980.5~1983.12)는 따뜻한 마음으로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다음 세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양육에 힘을 쏟았으며 이들을 신앙으로 교육하기 위해 교육관 건축을 시작했다. 이일에 온 교인이 나섰다. 화수리 주변에 널려있는 차돌을 망치로 일일이 쪼개서 기초를 다지는데 사용했고 하천에서 채취한 모래로 벽돌을 찍어 그 벽돌을 온 교인이 손으로 들고 머리에 이고 날랐다. 전문기술이 필요한 것 외에는 오롯이 교인들의 손으로 23평짜리 교육관을 완성했다. 19824월 교육관을 헌당하면서 조용욱, 조용희 장로임직과 함께 엄기수 목사의 담임목사 취임식을 거행했다. 김경환 전도사(1984.1~1985.3)1984년 1월에 부임하여 12개월을 시무한 후 후암교회로 떠났다. 뒤이어 부임한 김석환 목사(1985.6~1990.3)는 담임목사 취임과 함께 전용희. 이채순. 황태춘권사를 임직하여 교회의 일꾼으로 세웠다. 믿음으로 훈련받은 청지기들로 교회는 더욱 든든해져 갔다. 당시 마을과 교회입구에 7개의 가로등을 설치하여 마을사람들에게 칭송을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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