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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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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찰] 공주세광교회 이야기-1

김진수 2021-06-03 (목) 17:43 4년전 886  

교회이야기 8 공주세광교회 이야기

 

약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가슴에 품어 온 교회

 

공주세광교회가 세워진 충청남도 공주시는 삼국 시대, 백제의 수도였고 아직도 도시 곳곳에 오랜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유서깊은 도시이며 그만큼 전통에 대한 긍지가 강하다. 또한 공주의 지형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외부로부터 막혀있는 형상이다. 그래서인지 공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1984, 공주세광교회(이하 세광교회)가 세워지기까지 공주시에는 기장교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당시 충남노회(1987년 충남, 대전노회로 분립) 목회자들은 공주시 지역에 기장교회가 세워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공주시에 세워진 최초의 기장교회(1984~1985)

 

마침, 공주의 한 교회가 목회자의 교파이동 문제로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고 흩어진 교인들 중 장진배, 김복희, 박옥채, 최병례, 유영옥씨 등 5인이 1984412일부터 금성동 18-18, 사글세 건물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막노동, 외판원, 행상을 하는 분들로 전에 다녔던 교회나 교파를 옮긴 목회자와 관계없는 새로운 교단의 목회자를 찾고 있었다. 그동안 공주시에 기장교회를 세우고 싶어 했던 몇몇 목사님들은 이 소문을 접한 후, 마치 그때를 기다린 듯,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새 임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던 이상호 목사를 추천했다. 이 목사는 그해 1227, 세광교회에 부임하여 다니던 교회와 목회자로부터 상처받고 새 목자를 기다리고 있는 소수의 가난한 성도들을 품에 안았다. 공주시의 첫 기장교회는 이렇게 불현 듯이, 그러나 오래 준비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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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세광교회 첫예배당(1984. 4)                                  공주시 이인면 주봉리 예배당(1995) 


 

정의를 위해 고난당하는 이들을 품은 교회(1985~87)

 

이상호 목사가 부임한 후 성도들은 안정을 찾았고 교회는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예배장소를 산성동 160번지로 확장 이전하여 1985627일 설립공인예배도 드렸다. 그러나 세광교회가 공인된 1985년은 유신정권에 이어 군부세력이 민주적 절차를 짓밟고 세운 제 5공화국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타오르기 시작할 때었다. 공주시에서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 중, 신앙적 양심을 가진 소수의 기독학생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품어주고 구심점이 되어줄 교회를 찾아 기장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가 품는다. 가난했던 교인들과 그 교인들을 품어 온 이 목사는 기댈 곳이 없어 기장교회를 찾아온 학생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고 그들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해 914일 청년회 창립예배를 드리면서 공주교도소에서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문익환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 당시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 모이는 세광교회 청년회창립예배 강사로 오게 된 사건은 공주지역의 공안당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고 보수적인 공주지역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이로 인해 세광교회는 공주시기독교연합회로부터 연합회활동 금지처분을 받았다. 사실상 연합회로부터의 퇴출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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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수호집회 강사 문익환목사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은폐규탄집회                      19876. 10 항쟁


1987, 대통령직국선제 개헌과 민주화의 요구가 전국적으로 봇물 터지듯 일어났다. 년 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527일 전국의 모든 시민단체가 연합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었고, 그 어간에 이한열 최루탄피격사망사건까지 겹치면서 국본이 서울과 전국 22개 도시에서 개최한 610(6. 10항쟁)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폐규탄집회에는 학생들, 일반 시민 뿐 아니라 직장에 근무하던 넥타이부대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6. 29와 직선제를 포함한 역사적인 헌법 개정은 6. 10항쟁의 열매였다.

 

세광교회가 정의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품는 사역은 이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주지부를 결성하면서 일어났다. 경찰은 926일 후2, 공주 중동초등학교에서 모이기로 예정된 집회를 봉쇄했고 노상집회마저 불허했다. 1,000여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을 해산하기 위해 경찰은 옥내집회를 강요했고 집회장소를 구할 수 없었던 집행부는 급히 세광교회에 집회를 요청했다. 해산하려는 경찰과 집회에 모인 시민들과의 충돌이 크게 우려되는 가운데 예배당에서 옥내집회를 허락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국본' 공동대표와 대변인이었던 이상호 목사는 여전히 정의를 위해 고난당하는 이들을 가슴에 품었고 세광교회는 함께 고난의 짐을 지기로 했다. 경찰은 먼저 집행부와 시민들을 분리하기 위해(1), 그리고 예배당 안에 들어간 30여명의 집행부와 밖에서 연좌농성중인 시민들의 집회를 해산하기 위해(2), 또한 흩어지는 학생, 청년, 시민들의 가두시위를 막기 위해(3)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했다. 시내와 도로에 발포된 것은 제외하고 교회 현관 앞과 예배당 내에서 발견한 최루탄 안전핀만 14, 교회주변까지 합하면 약 50여발이 발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목사는 이 사건을 집회의 자유를 부정하는 경찰 권력의 횡포일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거룩한 예배의 성소를 유린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신앙고백을 발표한 후 즉각 무기한 단식기도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 목사와 온 교인들은 주일예배를 최루탄 악취가 남아있는 예배당대신 노상에서 드리기 시작했다. 노회도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노회교사위와 대책위원회를 통해 대책을 수립하여 시찰별 방문예배, 비상노회(3~5)를 개최하여 성전을 유린한 일에 대해 강력 항의했다. 총회 교사위원회에서는 기장 전국교역자대회를 열어 공주경찰서의 성전유린에 대한 사과, 책임자에 대한 직위해제를 요구했고 NCC 인권위, 충남, 공주지역의 기독교 인권운동 기관들도 이일에 함께 협력하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한 926일부터 그해 12월까지 노회와 총회, NCC, 지역과 전국의 민주화운동 세력까지 발 벗고 나섰다. 결국 공주경찰서장은 세광교회 최루탄 난사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공주시의 조그만 개척교회가 6. 10항쟁을 이어받은 충남, 공주지역 민주화운동의 최 일선에 서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온 노회와 총회까지 동참하여 공권력의 탄압에 맞서 민주화를 이루는 일에 구심점이 된 것은 매우 특별한 사례에 속한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에 개 교회차원에서 온 교회가 노상예배까지 감수하며 이렇게 강력하게 그 시대에 불의에 맞서서 공권력의 폭력을 규탄하고 민주헌법쟁취운동에 앞장선 사례는 찾기 힘들다. 그것은 어떤 위기에서도 늘 약자와 고난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피하지 않고 가슴으로 품었던 한 교회가 한국 현대사의 한 귀퉁이에서 맺은 작지만 소중한 은총의 열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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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 발사된 최루탄 잔해              이상호 목사 단식투쟁                       공주세광교회 노상예배

 


소외된 약자를 사랑으로 품은 교회(1987~2002)

 

1987“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점차 군부권력의 반민주적 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선회했다. 그리고 88올림픽과 장애인 패럴림픽을 치르면서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세광교회는 항상 역사의 변곡점마다 새롭게 부딪쳐 오는 도전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번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을 품는 일에 응답했다. 소외된 약자들을 품는 사역에 집중하게 된 데는 두 번의 계기가 있었다.

 

첫 계기는 가출한 아이들과의 만남이었다. 어느 날, 이 목사는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예배당 안에서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첫눈에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처럼 보였고 바닥에는 아이들이 배설한 듯한 오줌 자욱이 남아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영세 결손가정, 소년가장 아이들이었고 무더운 여름 밤, 덥고 짜증나는 집에서 나와 조용하고 시원한 교회에서 하룻밤을 지냈다고 했다. 순간 이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온 아기예수라는 생각과, 이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스쳐갔다. 두 번째 계기는 장애인들과의 만남이다. 1989년 전신마비 장애인 정상용 집사를 중심으로 공주지역에 장애인들의 모임인 소망회가 설립되었는데 장애인인 감리교 석승기 목사, 그리고 이 목사가 소망회의 지도목사가 된 것이다. 장애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사는 계층이 장애인들이라는 사실을 목도했다. 한 사지마비장애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결혼식 참석을 위해 식구들은 출타하고 거동이 불가능한 장애인 형제는 혼자 얼음장 같은 방에서 끼니도 거른 채 버려지듯 방치되어 있었다. 돕는 사람이 없는 장애인은 날마다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삶이라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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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는 모임 나들이                              불우아동, 장애인과 함께하는 마굿간 축제

 

이를 계기로 세광교회는 19893월부터 학원선교, 장애인선교, 불우아동선교를 시작했다. 교회는 이들을 돕기 위해 사랑이 있는 모임을 결성하여 결손가정 아이들, 장애인들과 함께 캠프도 가고, 교회 성탄절행사를 마굿간 축제로 마련하여 이들을 초청했다. 대외적으로 결손가정,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돕기 캠페인도 벌였다. 차츰 이들을 돕겠다는 후원자들이 생겼고 매월 생활비보조와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불우아동과 장애인을 재정적으로 도울 뿐 아니라 불우아동들과 장애인들을 적극적으로 예배에 초청했고 이들과 함께 사랑과 교제를 나누는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여 온 교인들이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서로 도와가며 한식구가 되어 가도록 했다. 그러나 행사위주의 선교는 그 한계가 분명했다. 행사에 참여하는 제한된 시간 외에는 그들을 온전히 돌보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1992, 공주시 기독교연합회는 세광교회에 대한 제재를 스스로 풀었다. 1985년 개척초기부터 군사정권에 맞선 민주세력을 품어준 세광교회를 불순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지역교계가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장애인들까지 품어주는 참사랑의 실천을 비로소 목도했기 때문이다.

 

1995년 세광교회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다. 사글세로 임대한 교회건물이 동사무소부지로 매각되었기 때문이다. 언제 또 옮길지 모르는 다른 사글세 건물로 옮길 것인가? 시내권역을 떠나 공주 근교의 저렴한 땅을 매입하여 이전 건축할 것인가? 를 놓고 고심했다. 다행히 공주시에서 조금 떨어진 이인면 주봉리 쐐기골에 가마니공장과 관리동 건물이 있는 1천 평 땅이 4천만 원에 나왔고 교회는 한적한 농촌지역으로의 엑서더스를 감행했다. 1995924, 60평 가마니공장을 예배당으로, 관리동 건물은 사택으로 개조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어머니 품 같은 주봉리 예배당은 접근하기에 불편한 것 외에는 모두에게 따뜻한 위로와 쉼을 주었고 잔디를 심은 넓은 마당은 장애인을 포함한 온 교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1998922일 세광교회는 열린 성전봉헌, 이상호 담임목사취임, 장진배 장로임직, 김복희, 박옥채, 최병례, 김영숙 권사임직식을 거행했다. 창립 14년 만에 온 노회의 축복가운데 치른 가장 큰 교회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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